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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평행계 분신
    Letters to D.J. (지수 외전)/SUPERMAN 2022. 10. 12. 10:54

     

     

     

     

     

    Another stories of Jisoos in parallel universes : 1. Superman (원본) (5)

     

     

     

     

     

     

     

     

     

     

     

     

    이전 같으면 드림홀을 과연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질의응답 시간을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저였건만 격자 형태로 해체되고 있는 몸을 보며 패닉에 일단 빠져버리자 따지고 물을 겨를은 없어지고 제 운반을 일임한 자들의 지시에나 순응해야지 하는 다짐이 절로 우러나왔습니다. 생존 본능이 이성의 뺨을 후려갈기는 바람에, 상념육신의 붕괴 속에서도 이렇듯 멀쩡하게 생각을 이어가는 저 자신이 있음을 망각하고 말았던 겁니다.

     

     

     

    갑자기 시야가 눈부시게 하얘졌습니다. 대폭발의 섬광이 이러할까요. 눈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감각이 느껴진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아직 소멸하지 않았단 명백한 증거였기에 우선은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지만, 급격한 환경 변화의 연타석 공격으로 정신을 차릴 틈은 좀처럼 생기지 않더군요.

     

    고농도 순백의 장막이 일 거에 벗겨지는 듯한 장면 전환이었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시야인지 헷갈리는 풍경 속으로 저는 쑤욱 들어와버린 겁니다. 말로만 듣던 순간 이동이란 게 이런 거라면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불유쾌한 체험입니다. 멋모르고 탄 롤러코스터에 화들짝 경기를 일으키며 손사래치는 시골 노인의 심경이랄까요.

     

     

     

    낡은 교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딱 봐도 국민학교 교실입니다. 제가 다니던 때보다 더 오래된 예전의 교실인 것 같습니다. 얼마나 오래전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진이나 영화에서 언제인가 본 기억은 있습니다. 70년대의 학교를 담아낸 것들이었는데 그와 대략 유사하나 정확히 몇 년 전의 모습인지는 가늠하기가 어렵네요. 저는 사용한 적 없는 짙은 갈색의 투박한 나무 책상과 나무 의자들이 발 디딜 여유만 겨우 남겨두고 나무 바닥 위에 빽빽이 들어차 있습니다.

     

    늦은 오후 같은데 해는 떨어질 기미가 없고 뜨거운 햇살이 달궈진 창문으로도 모자라 교실을 절반이나 데우는 쨍쨍한 풍광이었습니다. 아마 초여름의 네 다섯 시쯤인 듯 합니다. 물론 저의 추측이고요. 하지만 제 인생에 축적된 생체 데이터가 이 생경한 광경이 발산하는 정보 정도는 유추해 내고도 남지요.

     

     

     

    악 깜짝이야!

     

     

     

    갑툭튀한 얼굴이, 수채화처럼 고즈넉한 정경에 멍하니 고정되어 있던 시야를 꽉 채워버렸습니다. 통통하게 젖살이 오른, 갓 열 살을 넘긴듯한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었어요. 하얀 피부의 동글한 안면에 옥에 티처럼 군데군데 보이는 옅은 주근깨가 클로즈업될 만큼 코앞까지 다가오는 아이였습니다.

     

     

     

     

     

    여긴 너의 과거 아니 더 정확히는 네 과거의 평행계이다. (이 역시 네 이해를 돕기 위한 표현일 뿐 평행우주계는 거시적으로 모든 시간이 "지금" 함께 존재하는 동시계이다.) 우리는 너의 부분영혼을 이곳의 네 평행 분신 안에 일시적으로 입식하였다. 분신의 영혼에 일부 결합한 채로 분신의 몸을 통해 너는 이곳을 인식하고 있는 중이다. 이는 빙의가 아니라서 결코 네 뜻대로 분신을 조종할 수 없다 즉 네 임의로 분신을 이용해 허튼짓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 분신의 정신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독립적인 사고는 가능하며 우리와는 시공을 초월한 소통을 계속 유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영적 아바타는 4차원 영역에서 항시 너를 모니터링할 것이니 의문 사항 있으면 언제든 텔레파시를 행하라.

     

     

     

    어쩐지 꿈치고는 굉장히 선명하다 했는데 역시 이곳은 또 다른 현실 세상이었군요. 저의 분신이라면 지금 저를 놀래키는 저 귀여운 여자아이는 당연히 아닐 테고, 당장 거울이라도 봐야 궁금증이 해소되겠군요.

     

     

     

    너의 무수한 상념계를 살아가는 분신들이 지금의 너와 모두 판박이이거나 비슷한 유형일 거라 착각하지 마라. 아이, 어른, 여자, 남자, 동물, 광물, 곤충, 외계 지성, 휴머노이드, 영체, 빛의 존재, 요정, 마물 등등 너는 그 어떤 형태로든 다른 세계에서 존재할 수 있다. 너를 위시한 네 무한 분신들은 각각 우주의 크기만큼 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4차원 무의식 및 다차원 의식으로 연결되어 서로의 상념에 영향을 주고 있다.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교차하는 무한 상념들이 지금도 촌각을 다퉈가며 상념계들을 만들어내고 있기에 창조되는 세상들은 다채로울 수밖에 없고 개인의 상상을 벗어난 존재들도 끊임없이 탄생하는 것이다.

     

    첫판부터 상식 밖의 기괴한 시공으로 보내면 너의 영적 파장이 견디기 힘들 거란 판단하에 여기를 선택하였노라. 일견 너의 현실계와 별반 차이 없는, 평행 과거의 사건계이다. 고로 네가 하게 될 예상들은 대체로 틀리지 않으리라. 저 여자아이가 너의 분신이 아니라는 짐작부터 해서.

    그런데 분신을 확인하기 위해 거울을 들여다볼 필요는 없겠다. 넌 현재 - 파동으로 확장하는 - 영의 형태이므로 너의 의지에 따라 분신과 일체가 될 수도, 전지적 시점으로 분신과 그 배경을 관찰할 수도 있으니..

     

     

     

    아아 그렇군요. 그 말씀 하기도 전에 저는 벌써 보고 있습니다. 저 여자아이와 동갑내기 같은 반 친구인가 봅니다. 4학년 정도 되려나.. 그 시절 저의 모습이 보이네요. 제 추억의 앨범이 활동사진처럼 움직이고 있는 진귀한 장면입니다. 이게 꿈이 아니고 현실이라니요!

     

     

     

    엄격히 말하자면 여기도 너의 환상계라 완벽한 현실일 순 없지만, 적어도 대기권 밑 3차원 공간은 나름의 역사가 흐르는 사실적 사건 세상이라 봐도 무방하긴 하지.

     

     

     

     

     

    에이 깜짝 놀랐잖아. 열린 뒷문으로 그렇게 살금살금 오면 어떡해!?

     

     

    헤헤 많이 놀랐쪄? 작전 성공이네. 네가 바보처럼 멍하니 있으니까 괜히 놀래키고 싶잖아.

     

     

    어어.. 기분이 좀 이상했어. 몸이 나른해지면서 꿈 꾸는 것 같은 기분이 잠깐 들었어.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하여간 이상했어.

     

     

    지수 넌 원래 좀 약했잖니. 아무리 날이 더워도 그렇지 남자애가 왜 이리 비실비실해? 여자인 나도 요렇게 씩씩한데 흥!

     

     

     

     

     

    음.. 여기서도 같은 이름이군요. 지수..

     

     

     

    저는 이 여자애가 상당히 흥미롭네요. 4학년 때던가 저를 꽤 따르던 아이랑 외모부터 해서 닮은 구석이 많이 있어요. 이름도 기억나는데 효정이였나.. 좀 괄괄한 면이 있어 크게 끌리지는 않았지만 얼굴 하나는 적잖이 예쁜 편이라 당시 그 아이의 적극성이 싫지만은 않았었지요. 하는 짓이 맹랑한 게 그때 그녀를 보는 것 같습니다. 다른 점을 굳이 들자면 효정이는 선머슴 같은 숏커트로 기억에 남고 이 아이의 경우 양 갈래로 땋은 끝부분이 허리께까지 내려온 걸로 보아 상당히 길게 기른 머리 같습니다.

     

    무더운 여름이라 그런지 앞머리는 한껏 뒤로 당겨져 여러 색깔의 앙증맞은 핀들로 고정되었고 그걸로도 모자라 적당히 반짝이는 귀여운 액세서리들로 소박하게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잔머리까지 가지런히 빗겨 넘긴 정성이 예사롭지가 않은데 아마 엄마가 직접 혹은 숙련된 가정부를 시켜 매일 손질하고 관리해 주는 모양새입니다. 요즘 여아들은 복고풍으로도 거의 하지 않는 머리 스타일이라 이것만 봐도 꽤나 오래된 시절임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겠네요.

     

     

     

    짙은 파란색에 아주 작은 흰 도트 무늬가 땡땡 수놓아진, 얇게 하늘거리는 원피스. 살짝 비치는 시원한 소재가 계절을 실감 나게 하는 가운데 양 갈래의 꼬리를 묶고 있던 빨갛고 노란 방울들이 잘록한 허리 부근으로 수줍게 고개를 내밉니다. 아이의 옷 치고는 제법 짧아 패셔너블한 느낌마저 주는 치마 아래로 얼굴만큼이나 통통하게 살이 오른 뽀얀 맨 다리가 인상적입니다. 국민학생 것치고 고급 져 보이는 분홍 샌들과 그 안에 갇혀 꼼지락거리는 작은 발가락들. 역시나 - 아기의 그것처럼 - 통통한 발등과, 새끼발톱 하나에만 수줍게 발리어진 (그러나 결국 도드라져 보이는) 빨간 매니큐어. 저 시절 흔치 않았을 잘 사는 집 아이의 특징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네요.

     

     

     

    웃상의 예쁘장한 외모가 남자애들 사이에선 인기 좀 끌듯도 한데 한편으론 범생이 기질이 다분해 보여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고.. 반반입니다.

     

     

     

    이에 비하면 저의 분신인 이 친구, 비쩍 마르고 눈 밑이 퀭한 게 참 대조적이네요. 이틀 이상 안 감은 부스스한 머리하며 입성도, 다 못 살았을 시절 평범한 아이의 추레함을 아주 잘 대변하고 있어요. 다만 얼굴은 저 여자애 못지않게 귀엽상이어서, 잘생겼다란 표현보다는 이쁘게 생겼단 얘기를 더 들었을 법한 외양입니다. 또래 여자애들이 선호하고 선생님들은 귀여워할 인상이긴 한데 왠지 소심하고 어벙해 보여 공부를 뛰어나게 잘 하거나 잘 사는 집 아이가 아닌 이상 이 외모 프리미엄은 오래갈 것 같지 않고 오히려 또래 사내놈들로부터 왕따 당하기 십상일 듯한 기구함마저 엿보입니다. 좀 짠하네요.

     

    모습뿐 아니라 성격도 붕어빵이긴 합니다만 저는 그래도 빵빵한 집안 자제라는 타이틀이 최후의 보루로서 제 단점이 가져다줄 비루한 운명을 커버하고 실드 쳐 주었는데 이 아이는 그조차 없는듯하여 가련해 보입니다.

     

    이 여자아이가 설마 유일하게 남은 친구는 아니겠지요? 관심 보이던 친구들은 모두 떠나고 착하고 정 많은 이 아이만 남아 연민 어린 애착을 선사하는 건 아니겠지요. 이유야 어떻든 저토록 예쁜 여자친구가 아직 옆에 있어 다행입니다.

     

     

     

     

     

    넌 변소 안 갔다 와도 돼?

     

     

    이제 곧 집에 가는데 굳이 뭐.. 근데 넌 왜 케 오줌을 못 참니?

     

     

    그러게. 왜 그럴까? 참, 울 오빠가 그러더라. 오줌 나가는 길이 남자는 길고 여자는 짧아서 남자가 더 잘 참는 거래. 그럴듯하지 않니? 호호

     

     

    여자애가 못하는 말이 없어. 너 꼭 나한테만 말괄량이 짓 하더라. 다른 사람들한텐 얌전하게 굴면서..

     

     

    야 너 지금 얼굴 빨개졌다 크크.. 얘는 뭐만 하면 얼굴이 빨개져. 어디 얼마나 뜨거워졌나 만져볼까..?

     

     

    어허, 어디 감히! 너 내 볼 만지면 혼날 줄 알아?

     

     

     

     

     

    정말 만만한가 보네요. 마구 달려들어 양볼을 감싸 쥐려 하는 걸 지수가 두 손으로 양쪽 팔목을 잡아 간신히 저지하고 있습니다. 키도 별 차이 없고 발육 상태가 남달라 보이는 건강한 여아인지라 힘에 있어서도 결코 지수에게 뒤지지 않는 모습입니다.

     

     

     

    상대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맘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아이와 빈 교실에 단둘이 남았단 사실이 무척이나 흥분되는 듯 즐거워 죽겠단 표정으로 얼굴엔 홍조까지 피어오르네요.

     

     

     

     

     

    미치겠네. 너 왜 나한테만 걸핏하면 장난질이니? 너처럼 얌전 떠는 애가 나랑 둘만 있으면 왜 이래! 날도 더운데 에이 짜증 나!

     

     

    알았어. 그럼 이 손 놔줘. 안 그럴 테니까.

     

     

    정말이지? 손 놓으면 얌전해질 거지? 잘 생각했어 소영아. 우리 이번 주 주번인데 일주일 간 잘 지내야지. 첫날부터 이러면 곤란하지 그지? 어후 숨 차!

     

     

    맞지. 너랑 주번이라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데 앞으로 일주일 동안 재밌게 지내려면 오늘 너무 힘 뺄 필요는 없지 헤헤.

     

     

    으이그 그건 또 뭔 소리!? 알았어 하여간 우리 빨랑 집에 가자. 너무 늦은 거 같어. 봐 시계. 벌써 네시가 넘었다. 애들 청소 끝나면 우리도 바로 가라고, 아까 선생님이 검사하면서 그러신 거 너도 들었잖니. 네가 같이 가자 해서 이러고 있는데 넌 왜 자꾸 꾸물대?

     

     

    알았다구! 하아 남자 녀석이 나보다도 말 많네. 야 아파. 팔목 아프다고! 손 놔준다며?

     

     

    하나 둘 셋 하고 놓을 테니까 놓자마자 넌 손 뒤로하고 한 발짝 물러나는 거다!?

     

     

     

     

     

    얘네들 참 귀엽게 노네요. 그리고 아까 얘를 소영이라 부르던데 효정이가 아니고 왜 하필 소영일까요. 소영이란 이름 흔한 이름이긴 한데 어디서 들었더라.. 낯설지가 않아요. 실제 만난 적은 없어도 저하고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 인물이란 예감이 듭니다. 꿈에서 봤을까요? 전생의 인연일까요? 이쯤에서 힌트 좀 주시지요들? 텔레파시 날리는 거 저 이제 제법 익숙해졌는데 왜 이리들 잠잠하실까..?

     

     

     

    이건 천기누설이야. 더는 묻지 말라.

     

     

     

    천기누설이라.. 뭔가 있기는 있는 게로 구만. 영혼인 상태가 오래가다 보니 가뜩이나 예민한 촉이 한층 더 좋아진 것 같네.. 이 정도면 거의 백발백중 아닌가? 알았습니다 안 물을게요. 오케이?

     

     

     

     

     

    셋이란 외침과 함께 지수는 약속대로 잡고 있던 손을 놓았지만 오직 한 명에게만 개구쟁이가 되려고 작정한 소영이로서는 싱겁게 물러날 생각이 애당초 없었던 모양입니다. 팔이 자유로워지자 이때다 싶어 전광석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주 재빠른 손놀림으로 지수의 양볼을 세게 꼬집듯 움켜잡았고 그가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더 빠른 동작으로 손을 펴 멀찍이 물러섰습니다.

     

    약속을 어긴 소영에게 심통이 단단히 난 지수도 이번만큼은 물렁하게 넘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는지 씩씩거리며 그녀를 노려보는군요.

     

     

     

    흥 그렇게 쏘아보면 어쩔 건데? 하나도 안 무섭다 메롱!

     

     

    네가 감히 나와의 약속을 어겨? 더 이상 못 참아! 응징해 줄 테야!

     

     

    흥! 지수 네가? 참 잘도 그러겠다. 함 해보셔. 이거 기대되는데요 도련님?

     

     

     

     

     

    어이쿠, 저러면 안 되는데 소영이가 자꾸 도발을 하네요. 마치 뭔가를 기대하고 더 나아가 유도하는 것 같습니다. 샌님 지수가 그녀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 소영이 원하는 보복은 과연 무엇일지, 저 역시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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