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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후회와 미련
    이상한 연애편지 (상준 외전) 2022. 10. 21. 04:04

     

     

     

     

     

     

     

     

    경미야, 너에게 빠져드는 신선한 체험은 내겐

    현실의 여인을 사랑이란 현미경으로 세밀히 관찰하는 최초의 사건이었어.

    어려서부터 가져온 또래 이성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이 생생한 현실감을 차려입는, 경이로움이었어.

     

    내면에서 폭발하듯 분출한 감정의 파편들이, 날 둘러싼 따분한 일상의 거푸집을 산산조각 내는,

    주체 못 할 변화 앞에서, 난 적잖이 당황하였던 것 같다.

     

     

     


    어른의 보호 하에 그들의 편견으로 양육되는 미성년자는 그들을 닮아 보수적일 수밖에 없지.

    고치를 뚫고 나비로 날아오르기 전까진 (아니, 나비가 되어서도 날지 않는)

    그저 변화가 싫은 무사안일주의자에 불과해.

     

    고교 시절 나 역시 무기력한 겁쟁이일 뿐이라, 마음은 널 향해 달려가면서도

    다리는 굳건히 의자에 묶어놓고 있었어.

    결국 그 시절 나란 놈은 도무지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없게끔 구조가 짜여 있었던 것이고

    그 견고함을 허물어뜨리기엔 삼 년이란 세월은 너무도 짧았어.

     

     

     


    각 학급의 학습 부장들이 방과 후 교감실에 모였던 어느 날

    활달한 넌 시종 웃음 띤 얼굴로 제법 대범하게 나를 쳐다보곤 했었지.

     

    그때 이미 난 너의 귀여운 모습에 녹다운되어 게임이 끝난 상태였지만 겉으론 아닌 척, 내색하지 않았다.

    '너도 나한테 반했구나' 속으로 우쭐하며 너의 용기를 폄하하고만 이 어리석은 왕자병 환자를 보라.

     

    누가 먼저 좋아했는지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래도 남자가 더 용기 내어 결실을 끌어냈어야지.

     

    남녀간의 끌림을 감질나게 맛보는 소심한 쾌감에 젖어, 되도 않는 튕기기부터 시전 하려 하였으니..

    못났다 그지?

     

    남자의 됨됨이에 대한 혜안이 아직은 부족한 어린 소녀라,

    곱상한 머슴애가 그저 귀여워 보여도 순수한 연정은 충분히 작동 가능하였을 테고,

    덕분에 나 같은 모지리가 분수에 안 맞는 기고만장을 누렸구나.

     

     

     

     

    나보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넌, 속으로 내 우유부단을 탓하는 대신 대범한 소년 같은 시도를 행동에 옮겼지.

    나와 같은 반이던 스카우트 동료 단원의 입을 통해, 만나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왔었어. 기억하니?

     

    소녀니까 가능했던 제스처.

    지금에서야 뒤늦게 깨닫는, 눈물 나도록 고마운 풋풋한 적극성.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요동쳤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지금도 미스터리야. 왜 난 너의 반만치도 적극적이지 못했을까.

     

    설렘에 숨이 탁 막힐 지경인데도 만남을 실행에 옮기겠다는 간절한 의지는 생기질 않았어.

     

    소녀에게 사랑받고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고 아쉬울 게 없다는 심리였을까.

    (연애가 뭔지 모르는 국민학생이나 느낄 법한) 막연히 간질거리기만 하는 "로맨스 비슷한 무엇"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였을까..

     

     

     


    사춘기 소년의 성격이란 게 과연 정형화되고 규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진 모르겠지만

    그게 가능하다면, 16세의 나는 일반적인 사춘기와도 많이 동떨어진 돌연변이적 성격을 지녔던 것일까.

     

    내게 있어 넌 신비한 존재라서,

    신비로운 여성을 친구라는 허울로 중성화시키는 누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되면 널 향해 고조된 감정이 거품 빠진 콜라처럼 사그라들까 봐.

    그러한 허무를 감당할 수 없을까 봐..

     

    이제 와서 이따위 것들을 이유라 갖다 붙이고 있으니 쯧쯧.. (비겁하고 한심해..)

     

    고고하고 콧대 높은 범생이가 단지 공부에 방해된단 이유로 이성친구를 멀리하겠다는,

    완전 밥맛인 명분이 오히려 솔직 담백하겠어. 나 역시 그렇다 얘기하고 싶을 정도로..

     

    적당히 추상적이고 문학적인 그래서 그럴싸해 보이는 가식을 급조하였다면 실토하고 사과하는 게 맞지.

    그런데 어쩌니? 저 느끼한 변명들이 내게는 진실인 걸..

    범생이의 재수 없는 현실주의 때문은 절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다행스러운, 나아가 자랑스러운 이 심정은 또 뭐란 말이니.

    참 눈치도 없는 이 센티멘탈을 어쩌면 좋을까...

     

     

     


    진지 잔뜩 머금은 나의 이런 때늦은 하소연에 지금의 넌 차라리 웃고 말겠니?

    비겁한 변명이 그럴 듯 하긴커녕 다소 황당하고 생뚱맞지?

     

    어색하니까 얼른 화제를 바꿔서..

    너의 학창 시절은 어땠니.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듯 각자의 경험과 그에 관한 느낌도 다양하겠지.

    하지만, 사춘기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우린 서로를 조금이나마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나의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내적 갈등까지 보듬어달라면 좀 무리한 요구일 테지만.)

     

    보고픈 널 보면 무서워졌던 그 해괴한 아이러니를 넌 이해하니?

    사춘기 소녀의 복잡한 심경에 비하면 그건 노말 한 거라고?

    그렇게 말해주면 차라리 고맙겠어. 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테니까..

     

     

     

     

    넌 어쩌면 유치한 사춘기적 감상을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폐기하였는지도..

    이성에 대한 호감을 표출하는 방식이 나보다 훨 세련되고 의연하였으니 말이야.

     

    그랬다면, 넌 남녀 병학에 일찌감치 적응하여 이성친구 만들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리라.

    정녕 그랬다면 나의 퇴행적 부자연스러움이 꽤나 거슬렸을 터인데,

    관심을 급히 회수하지 않고 진득하니 호감을 유지해준 건,

    그냥 네가 착하고 해맑아서라는 이유로 밖엔 설명되지 않는 현상.

     

     

     


    일종의 퇴짜를 맞은 셈인데도 넌, 수치스러워 날 원망하고 미워하는 대신

    나에게 다가서기 위한 적극적인 자세를 꾸준히 견지하였지. 너의 착함이 감동인 순간이었어.

     

    표독스러운 자존심에 아직 덜 오염된 소녀임을 전제로 하더라도 결코 쉽지 않은 태도.

    다른 누구도 아닌 경미 너니까 가능한 행동이었어. 고마워.

     

    자기 아니면 삼 년 동안 여자 한 번 사귀어보지 못할 숙맥을 구제코자

    설익은 모성본능을 십분 발휘한 거라 믿는다면, 너무 멀리 나간 거겠지?

    그게 사실이라면 내겐 그저 감사한 일일 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럴 린 없겠지. 그래, 너무 멀리 나가긴 했네. 미안..

     

     

     


    나도 너와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면 자연스런 만남과 대화는 얼마든지 이뤄졌으리라..

     

    난 참 옹졸했던 것 같아. 너처럼 적극 다가갈 노력은 하지도 않고

    '어, 얘 봐라. 꽤나 적극적이네. 기분 황홀한데?' 이러면서

    먼저 말 걸어오길 은근히 바라던, 음흉한 공짜 심보.

     

    이후로도 난 그 기대와 희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네가 말 걸어주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거꾸로 되어도 단단히 거꾸로 된 거지? 이 대목에서 실소를 금치 못한다 해도 할 말 없어.)

     

    그리고 나는 차차 초조해지기 시작했어.

    혹시나 하는 기대는 점점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어.

     

     

     

     

    너도 결국 나의 남자답지 못함에 지쳐버린 걸까.

    나의 어리숙한 왕자병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만 걸까.

     

    나의 바람과 달리 넌 끝내 말을 걸어주지 않았지.

     

    어느 시점에서, 나에 대한 너의 관심이 단번에 폭삭 무너져버린 듯한 느낌을 난 강렬히 받게 되었어.

     

    가끔씩 있던 무언의 대면조차 그 기회가 시나브로 줄어들고 있었고.

    아울러, 날 보며 짓던 엷은 미소마저 어느덧 사라진 듯하였어.

     

    그간 호강에 겨워 "무서움" 타령을 한 나는

    드디어 진정한 무서움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거야. 

     

     

     


    이제 내게서 영영 멀어져 가는구나라고 느끼자 상심의 연못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어.

     

    여자의 노골적인 대시는 때가 있는 법.

    꾸밈없는 천진함이 만개한 명랑소녀의 황금기가 관대한 손짓으로 날 품으려 했을 때

    못 이기는 척 다가가 소년의 춘정을 망설임 없이 바치기나 할걸..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어.

    그리고 한동안의 소강상태.

     

     

     


    십 대 소녀의 시기에만 주어지는 발랄한 대담성, 그것의 소중함을 무시한 대가는

    시간차를 두고 처절하게 다가오고 있었지.

     

    그리하여 지금 널 향한 애달픔으로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있나 봐.

     

    끝이 보이지 않을 가슴앓이가 예고 없이 시작되고 있나 봐

    이제서야 염치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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