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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 결별
    상준 이야기/이상한 사랑 2024. 10. 30. 12:04

     

     

     

     

     

     

     

     

     

     

     

     

     

     

     

     

     


    백 미터 육상 선수처럼 뛰어가고 있는 연지를 따라잡기 위해 그 역시 전속력으로 달렸다.

     

     

     

     


    연지 씨, 기다려요! 연지 씨!!

     

     

     

     


    후안무치한 상준을 대신하여 석고대죄라도 하고픈 절절한 심정이 그녀의 가쁜 좌절을 막 추월하려는 순간이었다.

     


    운명의 교차점이 하늘에서 내려와 - 골목과 일방 통행로가 교차하는 - 미니 사거리에 포개어졌다.

     

    "연지를 상심케 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공범(?) 김인혁의 죄가 역설적으로 사하여지는" 비참한 설정이라 해석한다면

    너무 억지인가. 진짜 나쁜 놈은 따로 있는데, 왜 그가..? 비극적 우연을 가장한 운명의 철퇴를 맞아야 하는 것인지..

    정말 괜찮은 인간이라서 신이 일찍 데려간 걸까. 아니면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인간의 사고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카르마의 적용이 하필 이때 - 그 모든 복잡성을 함축한 - "깔끔한 우연"을 차려입은 것일까..

     


    불쾌함의 원흉이 숨어 있는 낯선 동네로 어쩌다 보니 찾아든 두 이방인들일 뿐인데, 정작 당사자들은 느긋하고

    왜 이들이 - 웃기지도 않는 - 추격전(?)을 벌여야 하나. 왜 그래야 되는지도 모르고 펼쳐지는 우스꽝스러운 레이스,

    이 허망함의 절정에서, 바짝 긴장한 "위험파(波)"는 인혁의 넋 나간 잠재의식을 감전시켰다.

     

     


    마을버스가 속도를 높여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연지는, 사고를 재촉하는 징조의 시치미 떼는 농락에 밀려

    사거리 중앙으로 죽음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위험해요!!

     

     

     

     


    저승사자가 밝히는 횃불처럼 싸늘한 전조등이 그녀의 전신을 겁탈하려는 찰나, 인혁은 몸을 날렸다.

     


    놀라 경직된 시공이 오줌을 지리는 동안, 무슨 수를 쓰든 죄인의 멍에만은 벗어 던져야겠다는 그의 강박적 부채의식이

    "잔인한 운명에 걸려 넘어질 연지의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여 놓았고 동시에 자신의 남은 생을 갈가리 찢어 버렸다.

     

     

    돌발(?) 상황을 뚫고 용감하게 돌진한 "인간 방패"가 급정거하는 버스에 깔리는 광경을,

    공포에 질린 그녀는 본의 아니게 외면하였다.


    "가혹한 희생이 마지막 선사한 기적"과 충돌하여 "얼어붙은 채로 드러난 행운" 위에 나뒹굶으로써

    대략 5년의 유예기간을 확보한 "연지의 생명"은, 그 순간

    혹독한 죽음을 "본의 아닌 외면 즉 안락한(?) 기절"과 맞바꾼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연지를 대신한 한 남자의 허무한 최후는 그녀에게 생색 한 번 제대로 내 보지 못하고

    일단 저승의 차가운 어둠 속으로 (이승이 낳은 부조리의 균열 속으로) 황망히 스며들어야 했다.

     

    강렬한 인상의 마지막 선행(善行)만으로 충분히 천국의 계단을 밟을 자격은 있다고

    인간 의식 너머의 냉정한 섭리가 단순 명쾌하게 판단할지, 그렇게 세상 사람이 흔히 짐작하는 대로의 결론이

    미지의 영역에서 과연 기다리고 있을지, (우리도) 그도 아직은 확신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일단은 "찬란하고 명료한 상승"보다 "흐릿하고 어두운 하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는지도..

     

    그렇게 망자의 혼은 망망한 중음을 거쳐 "부족한 인간의 굴레를 벗고 천국에 오르기 위한" 준비 단계로

    하염없이 들어가기만 할 뿐이었다.

     

     

     


     

     



     

     

     

     

     

     



     

     

     

     

    친구 인혁의 비명횡사로 인한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중심을 잃은 채 흔들리는 상준의 마음을

    민아는 어떻게든 추슬러 보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사교성 부족한 상준의 유일하게 남아 있던 죽마고우 (고등학교와 대학 동기이자 동시에 입사 동기이기도 한)

    인혁을 졸지에 잃은 충격과 "슬픔마저 압도하는 허무감" 때문에 그는 거의 매일 술로 자신의 위장을 학대했고,

    지역 신문들의 구인란을 이 잡듯 뒤지며 일주일간의 다리품 끝에 겨우 골라잡은 (생일 다음 날부터 다니기로 했다가

    다시 일주일을 연기한) 아르바이트 일자리도 결국 삼 일 만에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자책도 자책이었지만 인혁을 죽음으로 몰아간 직접적 계기가 연지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자꾸 집착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그녀에 대한 일말의 애정조차 급속도로 식어 버렸다.

     

    (이는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현상으로, 죄지어 두려움에 떠는 자가 적반하장 식의 선수를 치려 하는

    치졸한 자기 방어 심리에 불과하다.


    친구가 죽게 된 원인의 정중앙에 무책임하게 직장을 그만두고 한술 더 떠 바람까지 피우는 그가 도사리고 있음을

    본인도 잘 알면서 자신의 죄의식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 억지 이유를 가져다 엮어 - 아무 잘못 없는 아내한테

    책임을 전가하려 하는, 뻔뻔스러운 속셈이겠다.)

     

     

     

     

     

    서울이 아닌 홍주에서 구직 활동을 하는 통에 상준은 몇 분 안 되는 지인(知人)의 도움조차 받을 수 없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알량한 파트타임 자리 하나 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을 수밖에..

     


    번듯한 회사를 박차고 나온 유부남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탓일까.

    다니던 회사에 준하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가 적잖이 어려운 가운데, 한겨울 취업 비수기의 쓴맛에 휘둘리지 않고

    이력을 거짓으로 하향 조정, 자의 반 타의 반 마음을 비운 후 - 구직 포기 직전에 - 가까스로 채용된 곳이 물류 센터였다.


    창고 관리 및 배송 관련 일용직 근무자가 되어 마음 굳게 먹고 일을 시작하긴 하였으나 - 꽤 두둑한 퇴직금 하나 믿고 배가 불러서인지는 몰라도 - 막노동에 가까운 업무는 화이트칼라의 경험밖에 없던 그에게 처음부터 무리였다. 따라서

    장기간 몸을 담을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았고, 결국 이곳에서의 자못 당찼던 출발도 - 탐색이고 자시고 간에 쓸데없이 헛심만 쓰다가 - 한 달간의 실속 없는 "좆뱅이"로 막을 내려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을 게을리한다며 상준의 날카로운 신경을 박박 긁어대고 갈구던 현장 반장한테 폭언과 욕설을 던져

    자칫 주먹다짐이 오갈 수 있는 험한 분위기까지 조성하였으니, 설령 더 일하고 싶다손 쳐도

    그럴 수 없는 상황에 스스로를 몰아 넣었던 것이다.

     

     

     

     

     

    한편, 남편의 외도 현장을 (짐승의 정욕이 질펀하게 깔린 "구역질 나는 공간"을) 직접 목격한 연지는

    상준의 비겁한 심리를 질타할 의욕마저도 말끔히 달아나 버린 상태였으므로, 더 늦기 전에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미 냉정한 결정을 마음 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혼이라는 이름의 현실적 파국을 말이다.

    (그녀의 나이와 장래를 따져 볼 때, 견딜 수 없다면 하루라도 빨리 갈라서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그의 사람됨이 보여 주는 변화무쌍한 심리"에 덩달아 불안해하는 것도 진력이 났고,

    성욕에 퇴행적으로 집착하는 그를 선택한 것에 대한 조심스러운 후회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한때의 불장난 같은 사랑이 경박하고 경솔한 것이었음을 시나브로 깨달아가고 있던 터에

    "그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떠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이번 일이 발생하였는지라,

    연지의 차가운 결심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시일이 소요되지 않았다.

     

     


    문제의 심각성이 일파만파로 커지면서 - 인혁의 가족들이 그를 고소하는 등 -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치닫고

    있었으나, 서울에 거주하는 상준의 부모는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는,

    가뜩이나 그의 반쪽짜리 결혼 생활에 색안경을 끼고 마땅찮아하시던 그들의 입에서 "부모 말 듣지 않고 고집만 부리더니 꼴좋다"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을 (나중에 자연히 밝혀질) 일을 구태여 미리부터 알리고 싶지 않았던

    상준의 알량한 자존심이 작용한 결과였다.

     

     

     

     


    그날의 비극적 사건 이후, 한동안 현실을 놓고 될 대로 돼라는 식의 멍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는

    연지와 소영이가 있는 장인의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배회하는 날이 많아졌다.

     

    감춰야 할 치부를 들켜 죄인처럼 (실제도 죄인이지만..) 얼굴을 들지 못하는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는 상준"을

    대동하고 계약을 해지하여 - 그의 임시 거처였던 - 월세방 보증금마저 잽싸게 회수한 "그녀의 발 빠른 행보"를

    넋이 나간 듯 구경만 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하루 아침에 오갈 데 없는 신세로 전락한 자신이

    홍주시 한복판에서 방향을 잃은 채 청승맞게 이 골목 저 골목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책사유가 차고 넘치는 상준으로선 이혼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고 고로 위자료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전혀 잡음을 일으킬 의사가 없었기에 (설혹 그런 의향이 있더라도 이건 연지가 백 프로 이기는 싸움이었기에)

    마치 한몫 챙겨 어디로 급히 뜰 사람처럼 분주하게 서두를 이유가 하나도 없었는데,

    큰 결심이 선 듯 독하게 마음을 다진 그녀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상준이 다니던 (그녀 또한 다녔던) 공장"으로 찾아가

    그의 퇴직을 공식적으로 마무리 지은 후 퇴직금까지 받아 내기에 이르렀다.

     

    혹시라도 뻔뻔한 두 년놈이 선수를 치고 빼돌릴까 봐 다급한 위기의식이 동한 것이라면 - 피해자의 심정으로서 당연하고 상식적인 반응이긴 하나 - 두 사람 특히 민아를 너무 모르는 처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어쩌랴. 그녀가 착하고 말고를 연지가 참작해야 할 하등의 이유는 없는 것을. 사연이야 어떻든 그녀는 연지에게 그저 남편과 놀아난 상간녀일 뿐인 것을..

     


    상준의 갑작스러운 무단 결근과 - 이 또한 갑작스러운 - 인혁의 교통사고사로 인해 사무실 분위기도 무겁게 가라앉아,

    연지와 친분이 두텁던 몇몇 여사원들을 제외하곤 그녀의 방문에 대체로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그녀를 반겨 주는 소수의 사람들이 불미스러운 사건의 발단을 캐려는 수사관들처럼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는

    바람에, 심기가 불편해진 연지는 필요한 용무만 신속하게 처리하고 애써 냉정을 유지하며 공장 문을 나왔다.

     

     

     

     


    처자식을 부양하기 위하여 딴 주머니도 차지 않고 월급을 받는 족족 그녀의 통장으로 입금해 왔던 상준은

    연지의 반격으로 인해 거의 알거지가 되어 오도 가도 못 하는 참담한 지경에 빠졌으나, 그렇다고

    본인을 조여 오는 험악한 분위기가 가라앉기도 전에 - 빈대도 낯짝이 있지 - 덜컥 민아를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와 상준의 밀회 현장을 목격한 연지가 하도 어이없어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와 망정이지, 다른 우악스러운 여편네

    같았으면 온몸에 피멍이 들고 머리채가 남아나지 않았을 민아였다.)


    민아도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는 마찬가지.
    혹시나 하는 걱정과 불안 때문에 숨소리마저 죽이고 엎드려 있어야 할 입장이었으므로, 대놓고 그에게 손짓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보다 상준이 먼저 염려된 그녀는 간첩 접선하듯 밖에서 몰래 두어 번 그와의 만남을 갖고

    자신의 일처럼 그의 곤란한 지경을 안타까워하며 진심 어린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의 뻔뻔스러운 접선에 광명을 찾아 주는 (결과적으로 편안한 만남들을 보장해 주게 될)

    "최후통첩"이 드디어 연지로부터 날아왔다. 당장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그녀와 함께 법원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만일 협의 이혼 절차를 밟자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길 주저한다면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베푸는 마지막 "은전"을 미련 없이 거두고 두 사람에 대하여 별도의 위자료 소송을 진행할 것이니

    둘 다 개망신당하기 싫으면 속전속결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들어달라는, 한을 품은 여인의 추상같은 요구이자 경고였다.

     


    연지의 과감하고 신속한 움직임을 통해 - 알량하지만 - 사실상의 재산 분할 및 위자료 증여가 일찌감치 끝난 격이라

    (중산층이라 보기에도 민망한) 별 볼 일 없는 상준으로선 "공식 청구될지 모를 위자료"를 추가로 지불할 능력이 없었고

    따라서 선택의 여지 없이 그녀의 의도대로 움직여야 했다.

     

    뿐만 아니라,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가운데 뻔뻔함과 소심함 사이를 줏대 없이 갈팡질팡하던 그는

    연지가 "개망신"이라고만 넌지시 언급한 (소송 이외의) 구체적이지 않은 협박을 차마 직접 묻지도 못하고

    현실화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 속앓이 하며 - 혼자 상상하는 도리밖에 없었는데

    상상력이 풍부한 그에게는 이것이 주는 불안과 수치심 그리고 무력감 또한 대단하여

    이런 공포스러운 망상을 무마하기 위해선 무조건 연지가 지시하는 것들을 순한 양처럼 따라야 했다.

     

    (버스에서의 추행으로 인해 경찰서에 연행된 이후 두 번째가 될지도 모르는 망신살.

    첫 번째는 민아 덕분에 그럭저럭 수면 아래로 묻어 둘 수 있었으나 이번의 낭패는 어쩌면 수습이 불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컸다. 연지가 간통죄 성립 요건에 대해 무지하고 경찰이 통정 현장의 증거를 입수한 것도 아니기에

    상간하지는 않았다 우기면 그만이지만, 어쨌든 간통이니 고소니 운운하며 사방팔방 떠들고 다닐 게 뻔한데

    골치 아프고 낯뜨거운 장면의 연출은 어차피 불가피할 것이 아닌가.)

     

    그런 짓들을 거리낌 없이 저지를 땐 언제고 - 그러면서 또 - 체면 깎이는 일은 극도로 두려워하는 모순된 성향의 소유자

    전상준. 일단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장의 치욕은 면하고 싶은" 옹졸한 인지상정에 굴복하여

    연지의 싸늘한 배려(?)에 눈물 나도록 고마움을 느끼며 고분고분 그녀의 지시에 순종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의 남우세스러운 망상이 혹시라도 실현되면 안 되니까..

     

    그녀 말을 잘 듣는다 해서 만사형통이 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 순간만은 정말 그렇게 믿고 싶었다.

    바야흐로 일은 자꾸 꼬여가서 여러 개의 곤경이 동시다발적으로 들이닥치는 형국인 것 같아

    불길함을 느끼며 마냥 초조한 상태에서 - 그리하면 막연한 죄책감이 상쇄라도 되는 양 - 상준은 가급적 해맑고 순진하게

    연지의 비위를 맞추려 최대한 노력했다. 그렇게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 굳이 이제 와 뒤늦게 -  애씀으로써

    그의 가증스러움만 부각되는 것도 모르고. (혹은 알면서..)

     

     

    이렇게 자숙하는(?) 태도를 가시화하여, 그를 죄어 오는 또 다른 모멸의 그림자를 어떻게든 막아 보려는 것일까.

    의식을 부리는 무의식의 안간힘, 일종의 생존 본능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편법이 다 부질없는 헛수고임"을 알리고자

    "상준이 미처 대비하지 못한 위협"이 그를 실컷 비웃으며 달려오는 것까지는,

    그도 어찌해 볼 방도가 없었던 모양이다.

     

     

     

     

     

     


    애지중지 귀여워한 금지옥엽 막내딸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나타난 불행과 시련을 곁에서 기가 막히는 심경으로

    지켜봐야 했던 연지의 아버지마저 충격 때문인지 지병인 당뇨가 합병증으로 악화되어 몸져눕게 되었고,

    그녀의 다혈질 오빠는 벌여 놓은 생업까지 중단하고 급히 귀향하여 이를 부득부득 갈며

    숨어 버린 매제의 두꺼운 낯짝이 보이기만을 기다리다가 도저히 분을 삭이지 못하겠는지

    혈안이 되어 직접 발 벗고 찾아 나서기에 이르렀다.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시나리오가 통속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가운데 사돈에 의해 신변이 위협받는 한심한 상황으로까지 내몰리게 된 상준은 - 오빠 못지않게 자기를 증오하는 - 연지에게 무조건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빎으로써

    무서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그녀를 만날 수 있도록 간신히 허락을 받아내었고, 그렇게 007 작전 수행하듯

    일사천리로 이혼 수속을 밟아 나아갔다.


    벌벌 떠는 못난 남편을 살기등등한 친오빠의 시야가 포착하지 못하도록 막아준 걸 보니

    그래도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남자에 대한 (개미 눈물만 한) 연민은 남아 있었던가 보다.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이 - 무슨 수를 쓰든지 간에 - 좁은 홍주 땅에 숨은 놈 하나 못 찾아내겠는가.

    아끼는 여동생이 눈물로써 간곡히 만류하니까, 부글거리는 화를 억지로 끌어내리며, 알아도 모른 체 넘어가 준 것일 테지..)

     

     

     


    그런데 이쯤에서 한 가지 - 지금 생각해도 - 의아하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으니, 연지가 이혼과 더불어

    독단적으로 내린 냉혹한 결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의 하나뿐인 자식 소영이의 양육을 포기했다는 점.

     

    그리한 까닭이 오직 남편 전상준에 대한 처절한 배신감과 참을 수 없는 분노 때문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그의 유전자가 절반이나 섞여 들어간 아이이기에 - 본인의 딸이기도 한 소영이한테서조차

    그에 대한 환멸이 투영되어 - 어느 한순간에 보기 싫어지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아이를 무척이나 예뻐한 외조부모가 알면 그녀의 경솔하기 짝이 없는 독단적 결정에

    서운해함을 넘어 아연실색하고도 남을 노릇이거늘..

     

     

    가까운 훗날 "이래서 그랬구나" 자연히 밝혀지지만, 연지는 벌써 이때부터

    (기억의 골방 한 구석에 팽개쳐 둔) "잊고 있었던 빛바랜 꿈"을 꺼내어 먼지를 털고 어지간히 광도 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꿈을 이루는 계기가 되어 줄" 악역을 시의적절(?)하게 상준이 맡아서 제 발로 물러나 주고는 있으나,

    그 꿈이 현실화하는 데 또 하나의 걸림돌일 수 있는 소영의 존재 역시 물러나기 위해서는

    그의 악역만으론 아무래도 조금 부족하고 억지스러운 면도 없지 않았으리라.

     

    남편한테 버림받은 비련의 여인 이미지를 고수하면서

    (그 역시 아이에 집착하지는 않는) 아빠 자격 상실한 상준에게 소영이를 밀어낸다는 게, 본인이 생각해도

    속 보이는 이중적 행태 같았나 보다. 그러므로 연지 스스로가

    "직접 나서서 매몰찬 악역을 소화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상준의 노골적 비행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뭐랄까 좀 더 교묘하면서 미묘한 악녀 기질이 발현되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유년기의 어린 자식을 꼭 껴안고 양육권 투쟁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소영이를 탐내는 시부모의 속내에 이럴 땐 또 재바르게 부응하여, 배 아파 낳은 아이를 두 번 다시 안 봐도 괜찮다는

    독한 각오와 함께 - 상준을 비롯해서 그와 관련된 모든 인연들을 정리하고 - 홀가분한 새 출발을 하려는

    태세 전환 속으로 그녀는 빠르게 접어들고 있었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아실현의 욕구가 모성을 삼켜 버리는" 젊은 엄마라 할 때 과연 그녀를 이기적인 악녀라고

    쉽게 몰아붙이면 끝인가라는 다소 예민한 주제는 이 이야기에선 논외로 하겠다.)

     

     

    하여간 이참에 인생의 포맷도 아울러 실시하겠다는 연지의 야무진 포부가 이번 파국을 기점 삼아 수면으로 올라온 셈인데 그 정도로 "운명과도 같은 타이밍"이 그녀를 위해 세팅되었던 것이다.

     

    꿈을 위해 사실상의 친권 포기와 다름없는 결심을 하게 된 비정한 모정이지만, 세인들이 이를 차근차근 따져 비난할

    여유를 부리기엔 당시 상황이 남편을 규탄하는 쪽으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에겐 다행스럽게도 남편의 불찰이 너무도 극명한 덕분(?)에 "본인의 결함과 잘못이 당장은 희석되고 묻히는" 결과가 나왔던 것 같다. 의도하진 않았으나..

     

    (아니면 그녀를 어여삐 여긴 운명이 대신 의도하였던가. 아니지,

    이로써 나중에 - 해피엔드와는 거리가 먼 - 사달이 초래되었으니 어여삐 여겼다는 표현은 어불성설인가. 하긴

    운명이란 신은 악마로 오해받을 만큼 언제나 냉철하게 공평한 법이니까..)

     

     


    이렇듯 연지는 스스로에게 "자신은 떳떳하다" 암시하며

    본인의 당돌한 계획을 - 집요하다기보단 뜬금없이 - 관철하고 말았다.

     

     

    당신들이 손녀를 키워 주겠다 하는데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완강한 태도를 끝까지 안 굽힌 딸한테

    처음에는 "무척 섭섭하고 실망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않았으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자기 딸이 배우자의 배신으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와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감안한다면

    앞으로 연지의 시간은 -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 그녀만의 행복으로 가득 차야 마땅하다는

    결론에 친정 부모 이하 가족들 모두 도달하였고, 억장이 무너지고 피눈물이 나는 와중에도

    그녀의 "비전에 대한 확신"과 판단을 지지해 주기에 이르렀다.

     

     


    (임신 기간을 포함 햇수로 오 년의 세월이 빚어 놓은) 내리사랑을 미련 없이 해체하고 그 절망감을 이겨 내기 위해,

    예상대로 연지는 상준을 향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과도하게 증폭하였다. 이리하여 이 가엾은 여인은

    자신의 딸이기 전에 전남편의 씨앗임을 힘들게 강조하며 증가된 "감정의 앙금" 속에 소영이를 묻어 버리는

    고육지책을 - 생전과 사후 공히 - 두고두고 감내하게 된다. 즉, 어리석은 카르마를 기어이 불러들이고 만 것이다.

     

     

     

     

     

     


    한편, 상준은 "쉴 틈을 주지 않고 찔러대는 현실의 공격"을 다소곳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소영이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떠밀다시피 자기한테 양도하는 연지의 냉정함을 새삼 실감하며 그는 잠깐이나마

    적반하장 격의 배반감과 분노를 느꼈지만 곧,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심정에서 "이것이 다 못난 자신의 과보"라 인정하였다.

     

    그런데, 그녀의 냉정한 무책임에 비례하여

    하나뿐인 핏줄에 대한 (남겨진 분신에 대한) 애착은 - 당시 그의 이상한 자유분방함과는 달리 - 또 희한하리만치

    강해지고 있던 터라, 상준은 소영이 문제로 굳이 불쾌한 내색을 보이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물론 서릿발처럼 차갑게 변한 연지 앞에서 어떤 이유로든 감히 반감을 표시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내색은커녕, 연지의 "의외로 냉랭하고 단호한" 결단이 주는 신선한(?) 충격을 힘겹게 체험하며

    "당연히 그럴 수 있으리라" 오히려 그녀를 이해하고자 노력하였다.


    (사실 그리하지 않은들 무슨 수가 있으랴. 아무리 헤아려 봐도 그녀를 나무랄 자격 없는 남자인 것을..)

     

     


    자승자박이라고는 하나, 스물아홉의 그에게 닥친 함정치고는 너무 깊고 치명적이라는 느낌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액땜한 셈으로 웬만큼 마음을 비운 그는, 오빠의 미행을 간신히 따돌렸다 착각하고 약속 장소에 도착한

    연지에게서 "서울에 놀러 가는 줄로만 아는 해맑은" 소영이를 서둘러 건네받았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액땜? 그렇다면 앞으로 줄줄이 닥칠 - 인생의 난관인지 단순 해프닝인지 모호한 - 사건들도 전부

    그 무엇을 위한 액땜인 건가. 그 무엇이 있기라도 한 건가. 이러다 죽을 때까지 액땜만 하는 건 아닐지..

    혹여 상준의 삶 자체가 액땜일 수도.. 그럼 어찌한다..?)

     


    이때 상준은 다시금 놀라게 되는데, 한동안 (어쩌면 영영) 못 볼지 모르는 자식과의 이별 앞에서

    엄마가 어떻게 이리 담담할 수 있는지..


    눈물 한 방울 내비치지 않고 아쉬움의 표정 거의 없이 자리를 뜨고 마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그는

    이전까지 알던 연지가 아닌 생전 처음 보는 존재의 이상야릇함을 분명 포착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경찰에 쫓기는 범죄자가 야반도주를 감행하는) 조급한 심경으로 홍주를 뜰 궁리에만 골몰하던 상준에게

    그녀의 존재 의미를 깊이 살필 여유는 없었다.

     

    서울로 올라가 어머니에게 소영이를 떠맡기고 - 관재의 위기를 모면하여 기고만장해진 자포자기가 혼자는 겸연쩍어 - 시름을 벗 삼는 나날에도 "미래가 불투명한 자"의 전형적인 우울과 불안 자기연민 등은 한량 친구처럼 툭하면 찾아와 놀자 하니, 차분하게 자기 자신과 주변을 성찰할 (정서적으로 느긋할) 새가 어디 있었겠는가.

     

    하물며, 본격 활동 개시를 선언한 성적 집착의 노골성이 - 끝내 정신 못 차리고 - 고삐 풀린 망아지같이

    백주 대로상에서 "냄새나는 활개"를 치게 생겼는데 더 일러 무엇하랴.

     

     

    사태가 이러한데, 본인이 얼마나 연지를 사랑하고 있으며

    자신의 혐오스러운 "이상(異常) 성심리"를 극복하고 사랑해야 할 유일한 여자 또한 연지뿐임을

    깨달을 기회가 과연 오기는 할까 싶지만.. 그래도 가끔은..

     

    엄마 없이도 티 없이 무럭무럭 자라 주는 (그래서 눈물겹도록 고마운) 어린 천사 소영이의 붙임성 있고 애교 만점인 재롱과 커갈수록 연지를 그대로 빼닮은 깜찍한 외모를 보면, 매정하게 가 버린 그녀가 생각날 때가 있었다.

     

    그렇게 연지를 떠올리면서, 그녀에 대한 애틋하고 절절한 그리움이 실은 헤어지던 날부터 가슴에 자라고 있었음을

    상준은 아프게 수긍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한참이나 흐른 뒤여서, 그의 때늦은 그리움은

    진정성이 결여된 공허한 아쉬움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 적응이 어려워 추억이나 더듬는" 마음이 자동 반사적으로 연지를 향하였던 걸까. 실현 불가능한 재결합을 꿈꾸며?

     

    "그나마 상식(常識)이 관계 속에서 일상의 사랑을 빚던" (지금은 다시 갈 수 없는) 그 시절이

    어쩌다 한 번씩 그리워졌던 걸까. 허무를 맴돌다가 간혹 제정신이 돌아오는 환자처럼?

     

    분명한 점은, 그것이 순수한 사랑의 진솔한 뉘우침인지 "정상적인 관계라 당당했던 욕정"에의 때 묻은 미련인지

    갈피를 못 잡는 어리석음을 그때까지도 상준은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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