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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 현실을 할퀴는 사랑 2 : 대면
    상준 이야기/이상한 사랑 2024. 8. 9. 20:43



     

     

     

     

     

     

     

     

     

     

     

     

     

     

     

     

    여보세요? 인혁 씨?

     

    마침 자리에 계셨군요. 어떻게 좀.. 알아는 보셨나요?

    저도 나름대로 그이가 있을만한 곳을 찾아봤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네요.

     

     


    예, 연지 씨. 어제오늘 퇴근하자마자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수소문하고 있습니다. 
    곧 좋은 소식 있을 테니  너무 염려 마세요.

     

     


    내일이 상준 씨 생일인 거 잘 아시죠? 자기 생일도 안 챙기고 도대체 어디 숨어 있는 건지..

     

    정말, 너무 속상해요. 인혁 씨.. 흐흑..

     

     


    진정하세요 연지 씨, 더는 별일 없을 겁니다. 막역한 친구인 제가 누구보다 그 녀석을 잘 알지 않습니까?

    순진한 척해도 속으론 현실적이고 영악한 놈이라 절대, 자신이 소유하게 된 지금까지의 삶을 팽개치지 않을 겁니다.

    하여간 이럴 때일수록 연지 씨 약해지지 마시고 굳게 마음 다잡고 계세요.

     

    그리고 이 판국에 그 자식 생일상 못 받을까 걱정하시는 거예요? 연지 씬 참 마음도 넓으시군요.
    착한 연지 씨 맘 몰라 주고 철없는 짓이나 일삼는 그런 녀석, 생일은 뭔 놈의 생일입니까?
    미역국 한 그릇 먹을 자격 없는 놈이에요, 그놈은..

     

     


    공장 다니기 싫으면 정식으로 사표 내고 나올 일이지 아이처럼 왜 이러는 걸까요?

     

     


    자식이 원래 소심하잖습니까.  
    상사 면전에다 사직서 던질 용기는 없고 속은 부글부글 끓고, 참다 참다 폭발한 결과 "에라 모르겠다" 뛰쳐나온 거겠죠.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무작정 도망 나왔단 사실을 집에 알리긴 싫고

    뻔히 탄로 날 걸 알면서도 가출을 결심했을 겁니다, 아마..

     

     


    .....................

     

     


    여보세요?


    상준이 이 녀석, 나한테까지 연락 안 하고 잠수 탄 걸 보면 어디 깊은 데 꼭꼭 박혀 있는 모양인데..  
    사태가 잠잠해지면 틀림없이 제 발로 돌아올 겁니다.   
    연지씨, 요 며칠 이놈 때문에 마음고생 많으셨겠어요. 
    그놈 찾느라고 너무 무리하진 마십시오. 그러시다 병납니다.

     

     


    고마워요, 걱정해 주셔서..

     

    사람이 당당하질 못하고, 참 나..

     

     


    예에??

     

     


    소영 아빠 말이에요.우유부단하고 용기도 부족하고..

    이번 일로 새삼 많이 실망했어요, 그이한테..

    이전부터 한두 번 실망한 게 아니긴 하지만..

     

     


    아 예..

     

    모자란 인간들이 다 그렇죠, 뭐.. 세상에 완벽한 사람 있나요?

    그놈 좋은 면들도 꽤 있다는 거, 잘 아시죠? 그래서 사랑하고 결혼도 하신 거잖아요?!

     

     


    .....................

     

     


    그건 그렇고..

     

    어때요, 소영이는 무럭무럭 잘 크고 있나요?
    가만있자.. 고 녀석 엄마 닮아 무척 예쁠 텐데, 언제 한 번 보고 싶네요.

     

     


    네..

     

     


    아이고, 기운 내세요 연지 씨. 큰일 없을 겁니다.
    조만간, 그 자식 밧줄로 묶어서 연지 씨 앞에다 단단히 무릎 꿇려 놓을게요.

     

     


    인혁 씨도 바쁘실 텐데 이처럼 신경 써 주시니 제겐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원, 별말씀을..

    친군데 당연히 그래야죠. 아무튼, 빠른 시일 내에 좋은 소식 전해 드리겠습니다.

     

     


    네, 염치없지만 부탁 좀 드릴게요. 그럼 이만..

    안녕히 계세요.

     

     


    예, 들어가십시오. 걱정 붙들어 매시고요..

     

     

     

     

     


    연지는, 인혁과의 통화 중에 여자의 육감을 건드리는 불순한(?) 파장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필요 이상 과장된 듯한 그의 위로와, 상준을 마지못해 힐난하는 형식적 어조로부터,

    정보를 알고 있는 자 특유의 (의도된 연기가 어설프게 억누르고 있던) 안정감이 스며 나옴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인혁 씬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어. 
    그렇다면 왜 숨기는 걸까. 내가 알아선 안 되는 난처한 일이라도 일어난 걸까..


    그이는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위인이야.  
    아, 예감이 안 좋은데.. 제발이지 내 예측이 빗나갔으면...'

     

     

     

     

     

     

     

     

     

     

     

     

     

     

     

     

     


    백화점 팬시용품 코너에 들러 은제(?) 담배 케이스를 구입한 다음 제과점에서 작은 케이크를 사가지고 나오는 동안

    내내 누가 몰래 따라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인혁의 덜미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종종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미행당하는 느낌의 실체는

    좀처럼 가시화되지 않는 주도면밀함을 일정거리만큼 유지하는 것 같았다.

     

     

     


    '이상하네.. 내가 과민한 걸까. 나처럼 둔한 사람이 오늘따라 별생각을 다 하는군.

    연지 씨를 속여서 양심이 딸꾹질이라도 하나?

     

    설마, 연지 씨가 이 모든 걸 다 알고..? 아냐, 그럴 리 없어! 그녀가 귀신도 아니고..'

     

     

     


    택시를 잡아타고 상준과 민아의 보금자리로 향하는 도중에, 그의 찜찜한 마음은 깜빡 잠이 들고 만다.

     

     

     

     

     

     

     

     

     

     

     

     

     

     

     

     

     


    아예 신혼살림을 차렸구먼.

     

     


    용케도 찾아왔구나.

     

     


    말도 마라. 이 골목 저 골목 한 시간은 족히 헤맨 것 같다, 야.

     

     


    어디 들어가서 삐삐 치든가 음성 남길 것이지 미련하게 왜 헤매?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 동네가..

     

     

     

    이깟 일로 서로 피곤하게 뭘 오라 가라 해? 바쁠 것도 없고 나 혼자 쉬엄쉬엄 찾아오면 되지..

     

     

     

     

    어서 오세요.

     

     


    아.. 안녕하세요, 민아 씨.

    어? 벌써 한 상 차려 놓으셨네?

     

     

     


    인마, 시계를 보고 그런 소릴 해라. 아홉 시다, 아홉 시!  
    이 형님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으셨다.

     

     


    미안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퇴근 시각이 다른 때보다 삼십여 분 늦어지질 않나, 이것들 사고 집 찾느라 버벅대질 않나

    어찌어찌하다 보니 이렇게 됐네, 이 사람아!
    나도 배고픈 건 마찬가지여.

     

     


    그러게 케이크는 뭣하러 사 와? 우리가 이미 준비했는데..

     

     


    그래도 생일엔 이게 상징인데 내 어찌 빈 손으로 올 수 있겠는가, 허허..

     

     


    허면, 내 생일 선물이란 게 고작 이 케이크냐?

     

     


    하, 녀석 성미 급하긴.. 애도 아니고 선물은 되게 챙겨 쌓네.
    당연히 따로 준비했지! 내가 넌 줄 아냐?

     

     

     


    많이 시장하시죠? 국만 데우면 되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민아의 변함없는 다소곳함에 기분이 좋아진 인혁은 다소 짓궂은 농담을 주저하지 않고 던졌다.

     

     

     

     


    제수씨, 이 인간하고 있으면 다이어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겠습니다.

     

     

     


    다이어트라니?! 요렇게 날씬한 민아랑 다이어트가 무슨 상관이야??

     

     


    그러니 하는 말이지.
    너 같은 변강쇠가 밤마다 못살게 구는데 살이 무슨 수로 안 빠지겠냐.


    제수씨, 살이 쪽 빠지니까 아주 보기 좋습니다. 하하!

     

     


    어머! 저, 원래부터 이랬어요, 호호..

     

     

     


    야! 근데 너 말끝마다 자꾸 제수씨 제수씨 할래? 형수님이라 불러, 짜샤!

     

     

     

     

     

     

     

     

     

     

     

     

     

     

     

     

     


    차가운 아스팔트를 열심히 핥는 영하의 냉기가, 바람 한 점 없는 밤의 "매서운 맑음"에 짓눌린 채

    골목마다 배를 깔고 아나콘다처럼 꿈틀거렸다.

     

     


    민아의 옥탑방이 위치한 이층집 대문 앞에 한 여인이 서 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군. 어떻게 인혁 씨마저..


    이 집에 그이가 있단 말이지? 여긴 또 누구네 집이길래..
    인혁 씨 집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설마, 그새 이사 온 데가

    저번 집만도 못 한 이런 후줄근한 옥탑방은 아닐 테고.. 그래, 다른 친구 사는 곳이겠지.

    이런 데서 나 몰래 생일을 챙겨 줘? 참 눈물 나는 우정이로군..


    흥, 이렇게 꼭꼭 숨어 있으면 내가 못 찾을 줄 알고?!'

     

     

     

     

     

     

     

     

     

     

     

     

     

     

     

     

     


    자, 이제 불을 끄시죠. 스물아홉 먹은 문제아 양반!

     

     


    잠깐만! 촛불 끄기 전에 민아랑 사진 한 방 박아야지, 그냥 넘어갈 수 있나..


    민아야, 저 녀석한테 카메라 주고 넌 이리 와 옆에 앉아.

     

     


    네, 오빠..

     

     

     


    자식이 아주 할 건 다 하는구나.


    어라?? 이게 뭐예요 제수씨? 일회용 카메라잖아?

     

     

     


    뭐 어때, 사진만 잘 찍히면 그만이지.. 왜, 그거 만질 줄 모르냐?

     

     


    얀마, 카메라가 없으면 이 형님한테 미리 야그를 하지!
    그랬으면, 대빵 좋은 일제 카메라 가지고 왔을 거 아니냐.

     

     


    됐네. 민아가 날 위해 준비한 그 일회용 사진기가, 네 구닥다리 카메라보다 훨 나아.
    잔말 말고 제대로 찍기나 해라.

     

     


    야, 적당히 좀 해. 내 팔, 털 빠진 닭 날개 됐어.

     

     

     

     


    불 켜진 초들이 꽂혀 있는 케잌을 앞에 두고 진한 사랑의 포즈를 과시하는 두 사람이었다.


    바싹 붙어 앉은 자세로 상준의 긴 팔이 그녀의 아담한 어깨를 견고하게 둘렀으며, 민아의 두 팔 또한

    그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감겨 있었다.

     

     

     

     


    캬, 그림 좋네. 앗사리 뜨거운 포옹을 해 버려라. 키스까지 한다면 금상첨화겠고.. 흐흐..

     

     

     


    어머, 개구지셔라. 그만 놀리세요.

     

     

     

     


    민아는 얼굴을 붉히며 급히 떨어져 앉았다.

     

     

     

     


    아이구, 농담입니다. 아까 그 포즈 다시 부탁드려요, 제수씨.

     

     

     


    인마, 이거 이거.. 확실히 못하겠어? 우리가 키스하면 잘 찍을 수는 있는 거야? 후후..

     

     

     


    어머나!? 오빠까지 왜 이래? 호호..

     

     

     

     

     

     

     

     

     


    똑. 똑. 똑.

     

     

     

     


    무르익고 있던 방 안 분위기가 급속도로 썰렁해지면서, 난폭한 긴장감이 세 사람의 머리털을 동시에 곤두세웠다.

     

     

     

     


    너 누구 또 초대했냐?

     

     


    미쳤어?!
    너야 어제 들킨 김에 울며 겨자 먹는 셈으로 부른 거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누굴 초대하겠냐?!

     

     


    새끼가 말을 해도..


    '젠장, 내 뒤를 정말로 누가 밟긴 밟은 건가..?'

     

     

     


    민아야, 누구 올 사람 있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어 도리질을 하는 그녀 역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제발, 연지 씨만 아니기를..'

     

     

     


    야, 김인혁! 넌 또 왜 안절부절못하고 난리야.? 너, 설마..??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재수 없게..
    네 눈엔 내가 치졸한 배반형으로밖에 안 보이냐?

     

     


    니가 내 입장 돼 봐라. 못 믿을 사람 따로 있나..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누군지나 알아봐!

     

     

     

     

     

     


    툭툭 투둑!! 외부 출입문의 유리를 두드리는 효과음이 좀 더 거칠어졌다. 더는 마중을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조급함일까.

     

    "불행히도 짐작 가능한 불청객(?)의 방문(訪問)이 집어 던질" (너무 벅차 고통스러울) 난처함을 각오하며

    인혁은 심호흡과 함께 방문을 열어젖혔다.

     

     

     

     


    누구.. 십니까..?

     

     


    인혁 씨, 다 알고 왔으니깐 어서 문 열어요!

     

     


    .....................

     

     

     


    이런, 제기랄!!

    인혁이, 너 이 시키..

     

     

     

     


    독 안에 든 쥐 신세로 전락한 가련한(?) 연인들은 서로의 눈만 바라보며 돌처럼 굳었고,

    결심이 선 듯 비장한 표정의 인혁은 연지의 기습에 굴복하여 백기를 들고 말았다.

     

     

     

     


    여.. 연지, 미안해. 갑자기 직장 관둬서, 자기 놀랐지? 안 그래도 내일쯤 집에 들어가려고 했어.

     

     

     


    상준의 천연덕스러운 반응에 연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오해는 마! 이분은 인혁이가 부른 친구야.


    그.. 그렇지? 인혁아..?

     

     

     


    그녀 뒤에 서서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있는 인혁에게, 그는 비굴한 시선을 보내며 다급히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인혁 씨, 서울에 사신다는 여자친구분이 이분인가요?

     

     

     


    상준에게 고정된 경멸의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묻는 연지였다.

     

     

     


    맞아! 이분은 인혁이 애인이야.

     

     


    당신한테 묻지 않았어!!


    맞아요? 인혁 씨??

     

     


    ........................

     

     

     


    야, 인마! 왜 대답을 안 해?!

     

     

     


    이번에는 "난감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여 한쪽 구석에서 벽을 보고 돌아서 있던" 민아를 매섭게 쏘아보며 물었다.

     

     

     


    아가씨가 인혁 씨 애인 되세요?

     

     


    .....................

     

     


    애인 사이라면서 따로따로 오신 모양이죠? 이이랑 안면이 있으셔도 그렇지, 여기를 혼자 찾아오시다니..

    저로선 이해가 안 되네요.

     

    그나저나 여긴 대체 누구 집이야? 인혁 씨 이사 왔어요? 그렇다면 뭐 그럴 수도..

     

     


    역시 여보는 머리가 좋아서 사태 파악이 빠르단 말이야.

    저 녀석 이사 온 지가 얼마 안 됐어. 집들이 겸 내 생일 겸 뭐 겸사겸사 이렇게 모이긴 했는데 타이밍이 좀 그렇긴 하지?

    내 직장 문제만 아니었어도 이 자리에 당신이 빠지진 않았을 텐데..

     

    후회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가장답지 못한 짓을 덜컥 저지른 셈이라 우선 당신 볼 낯이 없구려.

    미안하네, 남편이 이 정도밖에 못 되는 사람이라..

     

     

     

    창피한 줄은 알아요? 금방 발각될 게 뻔한데 아내를 피해 숨을 만큼?

    그런데 지금 나한테 발각된 게 그거 한 가지는 아닐 텐데?

    은근슬쩍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갈 생각 하지 마! 내가 바본 줄 알아?

    다시 한번 묻겠어. 내 얼굴 똑바로 보고 얘기해! 당신 나 몰래 한 짓이 정말 사표 던진 것 하나뿐이야??

     

     

     

    이봐! 내가 잘못한 건 알겠는데 당신 또한 느닷없이 들이닥쳐서 이러는 건 좀 아니잖아?

    더구나 둘은 초면이잖소? 자, 흥분 가라앉히고 예의를 차려가면서 좋게 좋게 대화합시다.

    무엇이 당신같이 착한 사람의 신경을 건드려 이렇게 오버하도록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젠 나를 무례한 여자로 몰아가는 거야? 나 지금 최대한 참고 있으니까 더는 성질 돋우지 말아 줘.

     

    내가 여자로서 얘기하는데 내 모든 감각이 말해 주고 있어 여긴 틀림없이 여자의 방이다라고!

    저 화장대는 그 증거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야. 이 공간을 이루는 모든 디테일한 요소가,

    심지어 "이 냄새며 미묘한 분위기까지" 말로 표현 안 되는 모든 게 전부, "여자가 주인임"을 나타내고 있어 하나같이!

     

     


    왜 이래, 쓸데없이 예민해져서..

    제수씨가 자주 내려오니까 제수씨 방이나 다름없게 꾸며 놓은 거지.

    오늘은 저놈 퇴근 시각이 한참 늦어져서 이분을 먼저 이리로 모셔 온 거고..

     

     

     

    말이 되는 소릴 해! 내가 당신하고 인혁 씨 "전에 살던 집" 간 지가 보름도 안 지났는데

    뭘 자주 내려오고 뭘 야무지게 꾸며?!

     

    그리고 인혁 씨! 나한테 어쩜 이럴 수 있죠?! 이게 대단하신 자기들 우정의 실체인가요?
    이 추잡한 광경을 감추려고 저를 속인 건 - 백 번 양보해서 - 날 생각해 준 면도 있었다 치고 이해할게요.
    하지만 (저 인간이 진실이라 항변하는) 저런 "속 보이는 거짓말"조차 동의하신다면, 그건 참말로

    한 통속이 되어 날 비참한 바보로 만드는 거라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요!!

    자, 저 쓰러지는 모습 보기 싫으시면 이쯤에서 솔직히 말해 줘요. 처절한 우정은 잠시 넣어 두시고요.

    저 거짓말, 진짜예요??

     

     


    미안합니다, 연지 씨.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군요..

     

     

     


    너 이 자식, 무슨 소릴 지껄이고 있는 거야?!

     

     


    야 이 멍청한 놈아, 너야말로 되도 않는 발악 어지간히 해둬!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시원찮을 놈이..?

     

     

     

    뭐, 인마? 내가 왜..? 죽을 죄라도 졌어??

     

     


    어리석은 놈아, 현실 부정 그만 하고 이실직고해. 연지 씬 이미 다 알고 오신 거야.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라고! 씨알도 안 먹히는 그 어쭙잖은 설계일랑 당장 때려치우고 말이다.

     

     


    저 저, 약해 빠진 새끼.. 결국 이렇게 배신을 하는구나.

     

     

     


    뻔뻔한 인간.. 누가 누구한테 뭐라는 거니? 파렴치한 배신자는 바로 당신이잖아?!


    숨어 버린 당신을 찾을까 싶어 몰래 인혁 씨 뒤를 밟아 봤어. 왜, 미행했다고 또 뭐라 하게?
    오늘이 당신 생일인 덕에, 차마 눈 뜨고 못 볼 꼴을 일찍 발견할 수 있게 되었네. 천만다행이야.
    내 육감이 아니었으면, 당신의 역겨운 "이중생활"을 눈뜬장님처럼 모르고 지낼 뻔했어.

     

     


    혼자 소설을 쓰고 앉았구만. 맘대로 생각하라고!


    하루아침에 무능력한 실직자 남편이 되었으니, 오죽 정나미가 떨어지셨겠어?
    멀쩡한 직장 걷어차 버린 한심한 남편, 그래서 어쩌면 한동안 생활비도 못 갖다 줄 허접쓰레기 같은 남편

    버리고 싶어 안달이 나던 판에 기막힌 명분거리가 생겼으니 참 좋으시겠네 그치?


    남편 생일 축하는 못 해 줄망정 어디 와서 행패야, 행패가..? 이왕에 왔으니 밥이나 먹고 가.


    민아야, 오빠 배고파 죽겠다. 빨리 미역국 떠 와라!

     

     

     


    상준아! 너 지금 제정신이냐? 간이 배 밖으로 나와도 아주 단단히 나왔구나!!

     

     


    그래, 미쳤다! 기왕 엎어진 물 다시 주워 담긴 글렀으니 이게 맞지. 막나가는 게 어때서?

    자기는 백 프로 진실된 사람이라 거짓부렁이 죽기보다 싫다는데 어쩌겠어? 그렇다면

    좀 모질더라도 끝장나게 솔직한 모습 보이는 게 맞지. 안 그래?


    인혁이 너두 배고프다며? 음식 다 식는다, 어서 달려들지 않고 뭐 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지들 말고 이리 와 앉아. 우선 맥주나 한 잔씩들 하자고.

     

     


    ...........................

     

     


    이야! 잡채 맛 끝내주네. 너희들도 이것 좀 먹어 봐라. 우리 민아, 잡채가 특기래요.

     

     

     

     


    모두 망연자실하여 멀뚱히 서 있는 가운데 혼자 앉아, 서리가 내릴 만큼 싸늘한 공기를 젓가락으로 휘저으며

    상준은 식충이처럼 잡채 가락을 입 안에 열심히 욱여넣었다.

     


    "증오와 모멸감이 함께 녹아 과포화 상태가 되어 버린" 점액성의 눈물을 눈물샘으로부터 퍼 올리는 과정에서

    남편의 짐승 같은 면상을 후벼 파던 "안구의 광채"가 잠시 흐려지더니, 깜박임 없는 인형처럼 정지된 연지의 눈동자는

    이내 한 줄기 진득한 절망을 창백해진 뺨을 따라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것의 독소가 입술을 건드리자

    핏기 가신 입술이 바들바들 경련을 일으키며 일그러지기 시작하였다.


    녹아내릴 것만 같은 무릎 관절에 겨우 힘을 주어 조금씩 뒷걸음치던 그녀의 흐느끼는 어깨가 인혁의 가슴에 닿았고

    이를 신호로 연지는 극소량 남아있던 인간적 미련마저 미련 없이 투척한 후 뛰쳐나오게 되는데,

    "음탕한 날강도의 매음굴"같이 느껴지는 이곳에서 "유부남과 놀아나는 어린 창부의 메스꺼운 내숭"이

    매캐한 연기처럼 풀풀 피어올라 더는 참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뭐랄까

    화생방 훈련실을 박차고 나와 눈물 콧물 사방에 뿌리는 신병의 고통스러운 몸부림 같았다.

     

     

     

     


    연지 씨!!

     

     

     

     


    인혁은, 연지에게서 거지반 실성한 사람의 (위험 수위에 오른) 자포자기 냄새를 맡고

    황급히 그녀를 쫓아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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