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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현실을 할퀴는 사랑 1상준 이야기/이상한 사랑 2024. 6. 2. 15:32
넌 정말 대단한 여자야.
"베개를 가슴에 괴고 엎드려 있는" 민아의 등에 얼굴을 부비며 상준이 말했다.
이제부턴 내가 널 지켜줄게.
내가 널 사랑하게 된 이상, 다른 남자한테 몸을 파는 네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잖겠어?너도 나를 사랑한다면 기꺼이 그 일 그만둘 수 있겠지? 내일부터라도 말이야.
알겠어요, 오빠. 가게에 빚진 것도 얼추 다 갚아가니까 이참에 그만두고 다른 직종으로 옮겨 볼게요.내일 당장은 그렇고, 저 대신 들어올 아가씨들이야 항상 대기 타고 있을 정도니 사장한테 잘 얘기하면
나 하나 관둬도 별 문젠 없을거에요. 다만..
다만..??
오늘 우리 테이블 손님이 술값을 안 내고 가 버렸어요.
그런데 그게 왜?
............
뭐야, 그래서 그 술값을 네가 대신 지불해야 한다고?
제 불찰도 분명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이런 쪼잔한 새끼들!
오빠, 화내지 마세요. 물장사 인심이란 게 원래 다 그렇잖아요.
이래저래 업소에 남아 있는 소소한 빚까지 깨끗이 청산하고 나오려면 "내일 당장"은 언감생심이란 얘기로군..
마음 같아서는 그 빚이라는 걸 대신 지불해 주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으나, 현재 처한 형편상 호기롭게 큰소리칠 수도 없는 입장이라 그것이 그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고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올해는, 누가 뭐래도 꼭 복학하려고요.
그동안 - 다른 일을 하더라도 - 아르바이트는 무조건 계속해야 할 것 같아요. 급여야 지금보다 보잘것없겠지만..
나였다면 인생을 포기하였을 고난과 역경인데..
너란 여잔 참, 나를 부끄럽게 하는구나! 나도 내일부터 일자리를 알아볼 거야. 우리 둘이 힘을 모아 노력하면둘만의 행복은 충분히 지키고 가꿔나갈 수 있겠지? 그렇게 믿고 싶어. 그런 의미에서, 나..
내일부터 당분간 여기서 자도 되지?
한 점 의심 없는 눈으로 상준을 바라보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말로는 뭐든 다 해줄듯하면서 그런 공수표를 담보로 은근슬쩍 여자한테 신세 지려 하는
이 처량한 이기주의자의 선택적 속물근성을 그녀가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일까.
아니지, 나이만으로 그리 속단하기엔 (전투와 같은 삶이 가져다준) 민아의 내공이 만만치 않을 터이니
그냥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것일 수도.
그렇다면, 사랑과 위로가 절실한 여인의 눈이 기꺼이 자신을 속이고 "한 점 의심도 없는 눈"으로 변하였나 보다.
시곗바늘은 벌써 새벽 두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피곤이 몰려오는지 스르르 눈을 감고 꿈의 세계로 들어서려는 그녀에게, 상준이 다시금 슬며시 다가왔다.엎드려야 편히 자는 잠버릇의 민아가 적당한 포즈를 취하며 잠을 청하는데,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만만찮은 체중을 그녀의 벗은 등 위에 걸치며 올라타기 시작했다.
오빠.. 안 피곤해? 그만 자자, 우리..
민아야, 너도 어제 많이 피곤했지? 자꾸 힘들게 해서 정말 미안한데 말이다.네가 엎드려 있는 걸 보니까 이 아래로 또 피가 쏠리는 거 있지.. 응?
오빠도 참 대단해. 아무리 이십 대라도 그렇지 하룻밤에 네 번씩이나..정말 대단한 정력가 나셨어!
놀리지 말구..
너하고는 속궁합이 너무 잘 맞아서 그런가 봐. 자기야, 내가 이렇게 간청하는데 매정하게 그냥 자기야?진짜 이번이 마지막이다. 한 번만 더 하고 우리 자자.
호호호, 진짜로 이게 마지막이지?
응, 진짜로!!
푸훗, 정도껏 귀여워야 말이지.
나나 되니깐 이렇게 오빠를 상대해 주는 줄이나 알라고요. 다른 여자들 같으면 아마 견디지 못할걸..?
얘가 근거 없는 자신감에 쩔어 있네? 물론 넌 그럴만한 자격 있지만세상 여자들이 모두 너보다 못할 거란 자만심은 갖지 말도록!
알겠사옵니다 오라버니. 오빠 와이프가 있었다는 걸 깜빡했군요..
와이프라서 다 잘 맞춰 줄 거란 편견은 버려. 적어도 이 방면에 있어선 민아 네가 한 수 위야 아내보다..
칭찬으로 들을게요. 어쨌든 기분은 좋다.
그나저나 오빠.. 괜찮겠어요? 오빠 잘하는 거 내가 알고 그래서 나야 좋지만, 좋을수록 우리 좀 아껴가면서 하자.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넘 오바하는 건 싫어. 오늘만 날이 아니고 오늘부터가 시작인데
앞으로 천천히 즐기고 싶어 오빠와의 행복한 밤들을..
이렇게 마구 먹다 체하고 금방 질려 하면 나 삐칠 거야?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나. 이제야 임자를 만났는데 꿈에도 그리던 여자한테 어찌 싫증을 내?너만 괜찮다면 난, 지금부터도 두세 번은 끄떡없어! 네가 피곤하다니깐 어쩔 수 없이 한 번으로 족해야겠지만..
으그 못 말려..
그래서 한 번 더 해도 아쉬울 거라고요?
당연하지. 널 향한 내 사랑이 만족하려면 이걸론 턱도 없어.
하여간 못 당해..
날 사랑한다는데 뭘 더 어쩌겠어?
상준은 그의 열정적인 사랑(?)을 시답잖은 말 대신 행동으로 다시 보여주려고 민아의 배 아래 손을 넣어 그녀를 일으켰다. 그렇게 하여 전형적인 후배위의 포즈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고 이것은 상준의 고삐 풀린 욕망을 무차별 자극하였다.
그의 확신에 찬 사랑고백만으로도 민아는 너무 잘 준비될 수 있었기에 상준은전희를 생략하고 힘차게 진입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오가던 긴 이야기들의 무게로 잠시 짓눌렸던 "무중력 공간"을 둘의 뜨거워진 호흡이 풍선처럼 부풀리며 원상복구하는가운데 그녀는, 애잔한 현실을 점잖게 범하는 몽환적 세계 즉 "전상준이라는 시공"과 깊은 입맞춤을 나누며
그가 선사하는 (꿈결같이 나른한) 오르가즘에 익숙하게 젖어들었다.
상준의 무단 결근 일수가 삼 일을 넘어서자 공장측은, 무책임한 행동에 대한 질책의 정당성을 확보하고그의 결근이 회사와는 전혀 무관함을 명확히 내세우고자, 그의 집으로 연락을 하게 된다. 그리고
집에서 전화를 받지 않아 급기야 그의 처 연지의 친정집에까지 연락을 취하기에 이르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접한 연지는 처음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상준과의 관계를 어렵사리 지탱해 주던 부실한 끈이 드디어 끊어지고 있음을 강하게 예감한 그녀는,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고 침착하게, 사라진(?) 남편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상준과는 막역한 친구이자 회사 동료인 인혁에게 연지는 가장 먼저 도움을 청하였다.결혼 전 그녀가 직장에 몸담던 시절부터 인혁은 그녀와도 안면을 트고 지냈던 터라 - 남편의 친구라 해서 - 연락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지인이든 아니든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닌 것이, 상황이 상황인 만큼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라도 남편에 대해서라면 응당 물어봐야 할 판이긴 하였다.
한편 인혁이 역시 상준의 묘연해진 행방 때문에 근심스럽고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시원한 소식을 전하여 주지 못 해 되려 미안한 마음 금할 길 없었으면서도, 별일 아닐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영양가 없는) 위로의 몇 마디만 건넬밖에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가까이 있는 친구라고 가끔씩 본인의 우울감을 토로하곤 했던 상준을 생각하며 인혁은친구의 심적 고통을 깊이 이해하지도 함께 나누지도 못한 지난날에 대해 일말의 가책을 받았고
무기력증과 심란함을 동시에 느끼야 했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격무의 와중에도 틈틈이 홍주 일대를 이 잡듯 뒤지며
상준이 가볼 만한 곳을 찾기 시작하였다.
무단 결근 열흘이면 자연 퇴사 조치 되는 회사 규정에 따라, 그를 찾아 설득하고 가정과 직장으로 복귀토록 유도해야 할시간적 제약은 일주일.
정작 상준이 소속된 팀의 사원들은 느긋한 가운데 타부서에 근무하는 자신만 혼자 동분서주하고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된인혁은 씁쓸해지는 심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짜식.. 뭐가 그렇게 불만이었던 거지?
적어도 친구인 나한텐 내색도 하고 상의도 했어야 하는 거 아냐??
못난 놈.. 몰래 끙끙 앓다가 이런 식으로 일을 터뜨리나?!
녀석의 삐딱한 냉소주의야 학교 다닐 적부터 워낙 유명했으니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지만, 그래도 그렇지..어린애도 아니고 덜컥 잠적이라니..
마누라랑 새끼는 어떡하라고 이런 생각 없는 짓을 저지르냔 말이다.
아직도 총각인 줄로 착각하는 모양이군, 무책임한 놈..
그리고 이 사람들도 그래.한 솥밥 식구 중 하나가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이건 너무 태연하잖아!? 마치 내놓은 자식 거들떠보지 않듯 하네?
설령 상준이가 성격상 자기들과 제대로 융합하지 못한다 쳐도, 적잖은 세월 고락을 함께 해온 동료가
괴로운 나머지 잠시 철없는 행동을 했기로서니, 어찌 이리 냉랭한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아무래도 모두가 정상은 아닌 것 같아!
얘길 들어보니 특별히 큰 사고를 치거나 한 일은 없는 듯한데..
단순히 회사일 때문만이 아니라면 도대체 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고..!'
그는 한 가닥 실마리라도 건지기 위해 - 그나마 제일 만만한 - 품질관리팀 막내 박성민씨를 붙잡고 늘어졌다.문제의 "회식 사건(?)" 전말을 어렵지 않게 전해 들은 인혁은, 망망대해를 표류하다 무인도를 발견한 사람처럼
상준을 벌써 찾아낸 듯한 기쁨에 들떠 사건 장소로 향하였다.
잔뜩 경계하는 마담에게서 - 상준과 얽히게 된 - 민아라는 호스티스에 관한 정보를 가까스로 입수한 인혁은그녀의 행적이 상준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리란 짐작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여자를 유난히 밝히던 친구의 습벽을 익히 잘 알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험상궂게 생긴 지배인과 기도들의 마뜩잖아 하는 눈초리를 피해 돈까지 찔러줘 가면서 마담으로부터민아의 연락처를 간신히 알아낸 그는, 정신 못 차리는 놈을 혼내 줄 거사는 일단 다음날로 미루고
개인적인 볼 일을 위해 시내로 향하였다.
늦은 저녁 무렵, 용무를 마치고 "감로 백화점" 옆 골목을 돌아 나오는 인혁의 시야에바보 같은 녀석의 모습이 용케도 포착되었다. 그의 입장에선 하늘이 내려 준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백화점 후문을 막 빠져나오는 두 사람.
옆모습을 슬쩍 보이며 전방 사오 미터 앞에서 차도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남자는 확실히 상준임에 틀림없다.바짝 붙어서 남자의 팔을 껴안다시피 팔짱을 낀 젊은 여인 또한 의심할 여지 없이 민아일 거라고, 인혁은 굳게 믿었다.
쇼핑을 하던 중이었는지, 상준의 손에는 백화점 마크가 그려진 종이 가방이 두 개씩이나 들려 있었다.
'쓸개 빠진 놈..
내가 저런 놈 친구라는 게 원망스럽다.'
발을 재게 놀려 그의 등에 닿을 만치 쫓아온 인혁이, 손바닥으로 상준의 어깨 부위를 힘껏 내려쳤다.
야! 전상준!너 인마, 여기서 뭐하는 거야?!!
상준 본인보다 옆에 있던 민아가 더욱 놀라, 잔뜩 겁먹은 경계의 눈초리를 인혁의 얼굴에 고정하였다.
어어? 인혁이..?
너야말로, 여.. 긴 어떻게..?
'평소에도 그러했지만, 못 본 사이 더욱 노골적으로 흐리멍텅해진 눈빛이라니..
정신 나간 사람의 표본을 보는 것 같군.
자식이 색녀한테 걸려도 단단히 걸려들었네. 양기가 아주 쏙 빠져 버렸어!'
야, 정신 차려!!
공장 안 나오고 어디서 뭐하며 지내는 거냐. 너, 다음 주 수요일까지 복귀 안 하면 끝장이란 말이다, 알아?
야, 사람들 쳐다본다. 소리 좀 작작 질러라.
내가 뭐 휴가 나온 군바리냐? 복귀는 무슨..
얼빠진 녀석, 창피한 줄은 아냐? 사람들 눈이 무서운 놈이이런 개똥 같은 짓을 벌여?! 너 무단결근 한 거, 연지씨도 안다구!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그래? 그렇군..
벌써 4일이 지났으니 알 때도 되었지..
초점을 잃은 멍청한 표정으로 상준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유 없이 직장을 때려치우는 것 하나로도 기가 찰 노릇인데 너 이렇게 계집질이나 하면서 돌아다니는 걸 알았다가는,니 마누라 자살한다, 자살해!
이유가 없다고? 돌아가시겠군..
하긴.. 친해 봤자지. 인혁이 너라고 해서 나에 대해 뭘 그리 많이 알겠냐.
잡소리 말고, 아직 늦지 않았으니 더 큰일 나기 전에 나랑 집으로 들어가자! 어서!!
인혁은, 민아의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팔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이 손 못 놔?!
그리고 너, 말조심해! 기집질이라니! 민아 듣는 데서 그 무슨 망발이냐!?
망발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쯧쯧..
두 남자의 열띤 말다툼에 주눅 든 민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땅만 바라볼 뿐이었다.(상준의 팔을 감고 있던 그녀의 팔이 어느 틈엔가 풀리어 있다.)
그 모습이 영 마땅치 않은 인혁은 드디어 그녀에게도 말문을 열었다.
이봐요 아가씨. 내, 아가씨 뭐하는 여잔지 잘 아는데 말이야..결혼해 애까지 있는 유부남 꼬셔서 뭘 어쩌겠단 얘기지?
근데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깐..?
너 방금 그 말 인신 공격인 거 알고 하는 소리지?
인마! 네가 그러고도 친구냐? 나란 놈을 그렇게 몰라?! 얘는, 내가 지금 사랑하는 여자란 말이다!그러니 함부로 주둥이 놀리지 마!! 한 번 더 그랬다간 친구고 뭐고 가만히 안 있을 테니까..!
하이고 그러셔? 유부남께서 어련하시려구..터진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뱉어 내는구나! 그렇담, 연지씬 사랑하지 않는다 이거네?
.............
지금 네가 한 말, 연지씨한테 그대로 전해도 상관없으렷다?
...............
왜..? 꼴에 겁은 나는 모양이지?네가 정녕 사내 자식이라면 스스로 책임 못 질 얘긴 하지 않는 거다, 짜식아!
성인군자 나셨네. 너야말로 같잖은 잘난 척 어지간히 해 두고 똑바로 들어!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지금 연지가 아니라 민아를 사랑해! 이 여자를 사랑한다고!!
돌아도 철저히 돌았군.
그러나 어쨌든 인혁이 너한텐 면목이 없다.
친구로서 날 걱정해주는 네 마음은 고맙지만, 현재 내 심정을 좀 헤아려 줄 순 없겠냐?
너와 나 이제 어린애들이 아니잖냐.
주관과 의지 대로 살아가려는 내 모습을 이대로 떨어져서 지켜봐다오.
미친..
애하고 어른도 구분할 줄 모르는 놈이네 이거..
좋다, 직장 관두는 건 니 성격상 도저히 배알이 꼴려 그렇다 치자. 평양 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못 하는 거니까내가 그것까지는 강요하지 않겠어. 사지육신 멀쩡한 젊은 놈 어딜 가도 굶어 죽진 않을 테고, 결국은
무슨 일이든 적성에 맞는 걸루 찾아 하겠지.
그런데 말이야, 이것만은 알아 둬!
장가도 안 간 놈이 이런 말 한다고 속으로 비웃어도 좋은데 할 말은 해야겠다. 넌 장가 안 간 나보다도 못 한 놈이니까..
여태껏 살면서, 조강지처랑 자식 새끼 버리고 잘 되는 인간 한 놈 못 봤어! 그런 놈들은 다 천벌을 받았다구!
너두 설마 그런 말종들의 전철을 밟으려는 건 아니겠지?!
야, 김인혁! 넌 몰라 새끼야! 내가 겪어 온 고통을 니가 알기나 해? 난 병자란 말이다!와이프하고 내가 반(半)별거 상태에 있는 것도 실은 연지가 내 병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란 걸, 네가 아냐고 인마!!
연지는 나를 이해 못해! 아니, 처음부터 이해할 마음이 없었어.나를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변해 버렸다고 짜증이나 부리는, 그렇고 그런 여자들 중의 하나란 말이다.
끝까지 마누라 탓이나 하는 비겁한 놈이 더욱 가증스럽게 약자인 척을 하고 앉았네. 무슨 불치병이라도 걸렸냐?누가 봐도 넌 건강하기 짝이 없는 놈이야. 심신이 너무 건강해서 탈이 난 거라 이 말씀이야.
한심한 일탈을 합리화하려고 온갖 핑계를 지어낼 정도로 넌 그저, 사는 게 권태로운 게으른 이기주의자일 뿐이다.
그래 어쩌면 그게 니 유일한 "병 같지도 않은 병"인지 모르지.
그리고 연지에 대해서 단정 짓지마, 짜샤! 네가 언제, 니 와이프랑 진지하게 의논하거나 대화 나눈 적 있었어?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 봐. 없었지? 안 봐도 비디오다.
도대체가 말을 안 해요. 주위 사람들은 병풍이냐? 덜컥 일 저지르기 전에 한 번쯤 나를 찾아올 수도 있었잖아?친구 좋다는 게 뭐냐고..
이러려면 혼자 무인도를 가든가. 둘도 없는 친구라면서 날 따돌리고 이제 와 뒤통수를 이렇게 쳐?
백 번 양보해 병이 있다 하자. 네가 입 꽉 다물고 있는데 내가 무슨 수로 그 못 말리는 병을 알아 맞추겠니.
넌 학교 다닐 때부터 항상 그래왔어. 사내 새끼가 비밀도 많고 폐쇄적인 데다 쓸데없는 자존심은 또 얼마나 셌던지..
하긴, 눈곱만치도 약점을 드러내기 싫어하던 놈이었으니 지 입으로 "나 미친 놈이요!" 하고 떠벌릴 린 없었겠지.
그러다가 요렇게 딱 걸려서 도망갈 데가 없어지니까, 꼬리를 내리고그따위 비루한 변명을 최후의 보루인 양 끄집어내는 것이냐? 네 알량한 지존심을 미련 없이 팽개칠 만큼
지금 상황이 급하기는 급한가 보구나.
듣자 듣자 하니까 정말 못 들어 주겠군..야, 너 말 다 했어?!
아직 다 못 했다, 인간아. 듣기 싫어도 처들어!그래도 명색이 친군데 너같이 정신 못 차린 놈한테 이 정도 쓴소리는 할 수 있잖아?
친구 좋아하네. 여기서 더 나아갔다간 절교다. 그러니 선 넘지 마!
절교? 네가 그 말 할 자격이나 있어? 너야말로 적반하장이 선을 넘는구나.지금 당장 내가 하고 싶은 게 그놈의 절교다 이 자식아!
넌, 주변 사람들이 스스로 척척 알아서 너를 파악하고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거지? 그런 도둑놈 심보가 어디 있어?우린 초능력자들이 아니야. 이러니 연지한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네가 바로 문제인 거지, 새꺄!
혼자서 끙끙 앓다가 곪아 터진 상처를 누구한테 전가하려는 거냐, 이 비겁한 놈아.
치료를 게을리하고 덮어두더니 결국은 이 지경이 되었네, 쯧쯧..
너란 녀석은, 모래 속에 머리만 처박고 있는 타조와 하나도 다를 게 없어!
그만! 그만 해! 주둥이 더 놀리면 가만히 안 있겠어?!
듣기 싫은 소리가 약이 되는 법이다. 나 말고 누가 이런 말 해 주겠냐.서로 좋아서 결혼까지 했으면 어쨌거나 책임을 져야지.
제수씨 눈에 피눈물 나게 하지 말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제발 정신 차려라.
나하고 집으로 가자, 어서! 소영이가 눈에 밟히지도 않니?.................
소영이는 네 핏줄이야. 설마 소영이마저 포기하려는 건 아니겠지?
에이 씨발, 길거리에서 이 무슨 봉변이람..
야, 너 오늘 뭐 잘못 먹었냐? 너답지 않게 웬 사설이 그리 유창해?! 자식이 입만 살아 가지고..
니가 암만 잔소릴 늘어놓아도 소용없다. 이미 물 건너 갔다고.
내 마음은 이제 변하지 않아!
상준은, 그에게서 한 걸음 정도 물러나 있는 민아의 손을 잡고 인혁에게 보란 듯이 다정한 포즈를 자랑하였다.
못난 놈, 진짜 구제불능이군.
넌 머릿속에 바람만 잔뜩 들어간 껄떡쇠야.
죽을 때까지 그 잘난 육봉이나 휘두르면서 이 구멍 저 구멍 쑤시다가 볼 장 다 볼 새끼다, 넌!
너 같은 놈은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앞으로도 결혼하면 절대 안 되는 놈이기도 하고.연지처럼 신세 가련한 여자가 또 나오지 말란 법 없으니까..
이보슈, 아가씨. 그쪽도 내 말 새겨들어.
이 자식은 내가 잘 알아. 대충 즐기다 떨어질 거면 모르겠는데, 이놈 감언이설에 넘어가 혹시나 사랑 어쩌구 폼 잡을생각이면 애초에 꿈 깨셔! 이 자식은 병자라서 사랑을 못해요. 닭 쫓다 지붕 쳐다보는 개꼴 되기 싫거든
하루라도 빨리 얘랑 찢어지시라고.
여자한텐 일절 도움이 안 되는 색광이걸랑, 이놈은..물론 아가씨 역시 색녀라면 얘기가 또 달라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 충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편이 신상에 좋을 거요!
에라이, 상종 못 할 새끼!
네가 뭔데 첨 보는 민아까지 건드리는 거야? 나한테 지랄하는 건 참아도 얘를 능멸하고 모욕하는 건 용서 못 해!!
참다못한 상준의 주먹이 그에게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커다란 쇼핑백을 몇 개나 들고 설치는 굼뜬 동작으론인혁의 날렵한 모션을 따라잡기가 수월치 않았다. 그런데 사실 그의 수비 동작이 뛰어나게 민첩하다기보단
그를 가격하려는 상준의 의지가 애초에 강하지 않았다 보는 게 옳으리라.
본격적인 싸움을 위해 손에 든 것들을 바닥에 팽개치지 않은 것이 그 증거이기도 하고, 현재로선 제일 친한 친구한테
무식하게 주먹을 휘두르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만으로 의절의 의사는 충분히 전달되고도 남기에
기어이 피를 보는 데까지 진도를 뽑을 이유도 필요도 상준에겐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가볍게 공격을 피한 인혁이 역시, 보통은 넘는 솜씨로 잽싸게 상준의 팔을 꺾었음에도
(이심전심 그의 의도가 전해졌는지) 고통을 계속 가하는 대신 금방 풀어주는 쪽을 택하였다.
나, 길거리에서 주먹다짐이나 할 만큼 그리 한가한 놈 아니다.더 꾸물거릴 시간 없으니 앞장 서! 연지 씨가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으니까.
피하지만 말고 당당히 들어가서 네 그 빌어먹을 생각을 떳떳하게 밝히란 말이야!
인혁이 너 대체 내 친구야 연지 친구야?
어째서 나만 일방적으로 소 몰듯이 하는 거니?! 왜, 날 악역으로 못 만들어서 안달이냐고!!
뻔뻔한 데다 유치하기까지 한 놈..
넌 연지를 몰라.걔는 강한 여자야! 너나 내가 걱정 안 해줘도 잘 먹고 잘 살 여자란 말이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씨불이는 거냐?
인혁아 부탁이다, 제발 이러지 마.
내일 내 생일인 거 너도 알잖아?
................
설마 잊은 거야?! 그렇다면 좀 섭섭한데?민아하고 단 둘이서만 조촐하게 지내려 했는데 이렇게라도 널 만났으니 어쩌겠어, 그래도 홍주에 남아 있는
하나뿐인 친구니 일단 초대는 하마.
당장 절교하겠단 놈이 어울리지 않게 거 무슨 꼴같잖은 인심이냐?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난다, 짜식아!
여자한테 미쳐서 완전 맛이 간 줄 알았는데 생일 챙겨 먹을 정신머리는 남았나 보구나.
징한 놈.. 오기 싫음 관둬!
너 오늘 이딴 식으로 재수 없게 나오는데도 명색이 친구라서 큰 맘 먹고 결심한 건데, 감동은 못 받을망정고따구로 이죽거려야 속이 편하냐?
감동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너! 이번 생일 가족과 함께 보내지 않으면 반드시 천벌 받을 거다!
그 악담, 생일 덕담으로 받이들이마!
내 딴엔 니 잘난 우정 하나 믿고, 위치가 발각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널 초대하려는 건데..
너 자꾸 삐딱하게 나올래?!
.............
인혁아, 누가 뭐래도 넌 내 친구잖니?연지의 남편으로서가 아닌 그 이전의 한 인간 전상준, 네 앞에서 이렇게 떨고 있는 (한없이 모자란) 불안한 인생의
친구 아니냔 말이다.
내 아무리 잘난 구석 없고 빈 틈 많아 보여도, 적어도 너만은 내 판단을 존중해 주고 지켜봐 줘야 마땅한 것 아니겠니?
그래, 난 네 친구가 맞아.마른 장작 짊어지고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널 도저히 그냥은 내버려 둘 수 없는,
뼛속까지 "너란 놈의 친구"라고!
널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부디 한 번만 나를 믿어다오.
흠.. 어리석은 자의 고집은 스스로 꺾기 전엔 하나님도 어쩌지 못하는 법.
연지 씨랑 소영이만 불쌍하게 됐군..
인혁이 너.. 연지는 또 되게 챙긴다? 아직도 연지한테 관심 있냐?너도 왕년에 연지 꽤나 좋아했었잖아. 잘 하면 삼각 관계로 발전할 뻔했지, 아마?
역시 미친놈이야, 이 판국에 그따위 저질 농담이 터진 입에서 새어 나오냐?
하여튼, 내일 비싼 선물이나 준비해 갖구 와! 푸짐하진 않아도 저녁 한 끼는 멕여줄 테니.
민아 씨라 하셨죠? 아까는 본의 아니게 실례 많았습니다. 이 자식 때문에 사실 화가 많이 났었거든요..
아..아니에요. 충분히 이해해요.
오빠랑은 많이 친하신가 봐요?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모습, 보기 좋아요. 양쪽 다 좀 과격하긴 하지만요, 호호..
자신으로부터 봉변이라면 봉변이랄 수 있는 수모를 당했으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얌전하게 사과를 받아들이는그녀의 태도에, 인혁은 속으로 적잖이 - 예상밖의 - 놀라움을 느꼈다.
야, 메모지 키우면 한 장 줘 봐.형님 삐삐 하나 구입하셨다. 번호 적어 줄 테니 내일 퇴근길에 삐삐나 쳐!
개나 소나 다 가지고 다니는 삐삐 이제사 구하고 자랑이냐? 흐흐..
그나저나 너답지 않게 똥배짱이 제법인데? 내일 진짜, 연지씨 데리고 들이닥친다? 괜찮겠어?!
말없이 미소 띤 눈으로 그를 응시하는 상준.
뭐야, 그 느끼한 웃음은..?내가 그리 못할 것 같냐? 믿는 도끼에 발등 한번 찍혀 볼래?
그래, 꼴리는 대로 해봐라 새꺄.
우리 먼저 간다. 내일 보자, 그럼..
내일 뵐게요..
다소곳이 고개 숙여 목례를 하고 다시 자연스럽게 상준의 팔에 매달리는 그녀였다.내숭인지는 모르겠으나 - 인혁의 편견과는 다르게 - 호스티스치고는 꽤 조신해 보였으며,
누가 봐도 감탄할 미모는 아니나 이따금씩 등장하는 수줍은 애교가
뭇 남성들의 호감을 살 만한 여성적 매력을 야릇하게 풍기고 있었다.
'참 묘한 인상이야. 어둠과 밝음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저 쓸쓸한 발랄함은 뭐지..?
상준이 녀석.. 여자 고르는 엉뚱한 안목하고는..아니지, 그다운 선택 같기도 해. 희한하게 어울리는 한 쌍이군.
어떻게 결혼했을까 싶을 정도로 연지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른 녀석인 거 인정.
그런데 이 여자는..
마치 여자 전상준을 보는 것 같다. 소울메이트란 게 저런 느낌인 걸까?
이크,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전상준 저 인간의 최면술에 또 말려들고 말았네!
인혁아 정신 챙겨라! 결론은 하나다, 이건 불륜이라고 불륜!'
어두운 거리의 저편으로 멀어져 가는 낯 두꺼운 연인의 다정한 뒷모습을 부러운 듯 물끄러미 바라보다가그는 허깨비한테 홀린 사람의 아득한 몽롱함에서 문득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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