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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 경과지수 이야기/스토커? 스토커! 2024. 9. 22. 17:12
화숙이와의 날벼락같은 결별 이후에 지수는, "자신만의 세계"라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그 컴컴한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속도가 가파르게 상승함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방어 기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일상의 감정 기복을 무의식의 영역 속에 던져 버리고 무미건조한 단순함을 강박적으로
유지하던 그였기에, 그녀가 안겨준 참신한(?) 절망이
그를 저주받은 무의식에서 힘차게 건져 올리는 충격 요법으로 작용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일 없듯 평상시의 잔잔한 "단절과 체념의 상태"에 온전히 귀속된 것도 아니었다.
(지수의 입장에서) 참으로 이상했던 그 누나로 인하여, 제법 견고하던 무의식의 입가엔 당황의 (꽤 깊은) 흔적이 파문처럼 서리게 되었고, 이 파문이 그간 잘 가동돼오던 "지수 표 무의식"에 오작동을 유발했는진 몰라도
그는 더 이상 "생활이라는 의식"을 참아 내기가 힘들어졌다.
화숙이란 존재는 쉽게 잊혀 망각 속으로 묻힐지언정 그녀가 방아쇠를 당겨 일으킨 (짧지만 강했던)
"무의식의 곽란"은 - 지수의 천둥벌거숭이 같은 내면을 근근이 제압하고 "가지런해지고 싶은 피동적 욕구"를 간신히 지탱해 주던 - 모범생이라는 가면을 시나브로 녹이기 시작하였고 이는 동시에,
들키지 않으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주변의 사람들이 눈치챌 수밖에 없는 노골적인 변화이기도 하였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이제껏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고픈 마음은 여전하였으나
그는 이미 조절이 불가능한 지점까지 오고 말았다. 이는 곧,
"미스 나"로서 현재를 살아가게 하는 "무의식의 면역력"이 점점 고갈되어 바닥이 드러나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결국, 막연하게 번져오는 사태의 심각성을 - 그나마 막내에게 좀 더 관심을 주고 있던 - 어머니와 큰형이 칼같이 인지하고
상응하는 대책을 전광석화처럼 마련하게 된다.
바윗덩이처럼 짓누르는 "은밀한 비밀"을 마 비서, 김 기사와 나누어 지긴 했어도
발각될까 불안해하는 조바심은 늘 그 둘의 몫이었고, 정작 지수는
장본인이면서도 그 비밀의 치명적 파장에 그닥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만성적 패닉을 지속적으로 가하는 현실 앞에서, "떠나간 비밀"은 제아무리 덩치가 크고 무시무시해 봤자
그저 희미해져가는 그림자일 뿐이었다.
발설이 되든 말든 그것은, 현재가 던지는 "존재의 고통"에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기에..
발각되어서 이 권태로운 "서글픈 공포"가 잠시라도 지긋지긋한 횡포를 멈추고 찌그러질 수만 있다면
차라리 그리 되길 바라고 싶은 심정으로, 그는
"가족이란 이름의 타인"이 차려 주는 (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삶에 끌려갈 따름이었다. 다만,
호흡 자체의 고뇌를 묵직하게 짊어진 듯 행세하나 결정적일 땐 14세 철부지답게 사고를 치고 싶어 하는 지수가
자기 때문에 안절부절 노심초사하는 두 사람은 안중에 없고
굳이 충족시키지 않아도 될 천진한 호기심에 빠져드는 순간이 종종 있으니, 가령
이 고약한 비밀이 부모와 형제들 나아가 집안 전체로 누설된다면 어떠한 불상사가 발생할 것인가와 같은 궁금증 말이다.
그들이 지금 취한 조치와는 비교도 안 될 핵폭탄급의 무엇인가가 자신에게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에 젖어
희열을 느끼게 될..
지수의 자기 파괴적 "감정 유희"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마 비서는 그것이 실현될 기회를 최대한 차단하면서,
사모님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일사천리로 수속을 밟아 그를 데리고 바다를 건넜다.
아직 일 년도 더 남은 (한국에서의) 중학교 생활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아무 미련 없는 아니 아무런 생각이 없는 신생아가 되어 지수는 그렇게 미국으로 떠나갔다.
미 캘리포니아주에 진출한 해외 지사에서 그를 살뜰하게 보살펴 주었고 지수는 거기서 명문 사립학교에 편입하여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치게 된다.
"무사히"란 수식어를 첨가하기가 어색할 만치 타국에서의 청소년기 학창 시절도 그의 경우에는 무탈함과 거리가 있었다.
자국에서도 또래와 잘 섞이지 못하는 그의 특이한 내향성이 서양의 문화에서 통할 거라 생각했다면
무책임할 정도로 순진한 발상인 것을..
드넓은 지구의 "피부색이 다른 영역"이라 해도 다 거기서 거기, 그렇고 그런 똑같은 인간들이 사는 세상인데
선진국이라 하여 무어 특별할 리 있겠는가.
답답함을 야기하는 그의 성정, 너무 소극적이라 매사가 본의 아니게 착한 척 순진한 척이 돼 버리는 그것은,
되바라진 몇몇 녀석들의 (어디에나 있는 좆같은 부류이자 가히 미국판 철용이나 민호라 할만한 놈들의) 심기를
이유 없이(?) 긁어대면서 결국엔 그를 타깃으로 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별로 신통치도 않은) 재주가 있었다.
마치 "데자뷰가 진행되듯 물 흐르듯이 다가오는" (일상과도 같은) 소소한 운명을 그런 식으로 정렬하는 것 같았다.
아직은 때 묻지 않아야 할 (희고 검은) 소년 소녀들이, 원초적임을 가장한 싸구려 본능을 해맑게 발산하는 형태로..
초기에는, 신기하게 생긴 종자들이 자신을 오히려 신기한 벌레처럼 취급하는 게 그냥저냥 귀여워 보이기만 하였다.
어린 나날의 인생이 통째로 생경한 이국에 옮겨졌으니, 그와 한몸같이 얽혀 있던 "권태와 불안의 하이브리드 폼"이
잠시 생경함에 들떠 주인과의 지겨운 결합을 미뤘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잠깐이나마 이방인 시각에서 평화스러운 객관화를 만끽하는 일종의 허니문 기간이
인종차별의 쓴맛조차 달착지근하게 느껴지는 착각을 불러일으켰으나, 이 역시 충분히 예상 가능하듯
원하는 만큼 오래 이어질 리 없었다.
서양 문화의 특성상 이곳은, 든든한 보디가드 마 비서의 잦은 개입과 으름장이 스무스하게 통하던 한국과는 다르게
자본주의의 원조임에도 "당근과 채찍"이라는 일 처리 전술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을뿐더러
완고한 원칙주의에 "감히 동양인 주제에.."라는 괘씸죄까지 추가되어 쇠고랑 차지 않으면 천만다행인 지역이었다.
("지수가 대단한 집안 자제라는 프리미엄"이 적용될지 여부는 일단 원칙주의의 횡포가 있은 후에나 결정될 수 있는
사안인데, 그의 호화로운 배경이 과연 여기서도 통할지는 백 퍼센트 장담할 수 없는 게
그가 다니던 학교의 학생들 중 상당수가 소위 "있는 집 자제"들이고 그에게 집적대는 짓궂은 말썽쟁이 놈들 또한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인종적 우월감과 이에 따른 차별 의식은 그들의 위선적 정신문화에 구더기처럼 박혀 있는 필요악적 정서이므로
개선하는 체 연기만 할 따름이며, 이러한 감추고픈 치부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그 누구든 제기할 양이면
역린이라도 건드린 양 과민하게 반응하여 "그들이 당당하게 밀고 있는 다른 이슈들"로
(예를 들어, 불가침의 영역이 되어 버린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정의"라든가..) 얼마든지 확대하고 두들기고 덮어씌울 수
있어서, 마 비서의 운신의 폭이 한국에서만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이곳의 현실임을
그도 지수도 인정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말까지 잘 통하지 않는 타국이라 어쩌면 한국에서보다 더 괴로운 상황이 장기간 전개되는 건 아닌가 우려도 있었으나
지수는 의외로 꿋꿋하게 잘 버텨 주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귀국할 수 있다는 (그에게 부여된) 조건이,
그로선 가뜩이나 한국에서의 체험에 비하여 온화하게만 여겨지는 "개인주의의 귀여운 해코지"를
더욱 말랑말랑하게 (넉넉히 견딜 정도의 수준으로) 느끼도록 해 준 덕도, 물론 무시할 수는 없겠다.
아울러 녀석들의 바로 그 "지독한 개인주의"가 본인들로 하여금 괴롭힘의 대상에 대한 흥미를 쉬이 잃게 만들었으니
이에 대해선 속으로 쾌재를 부를 만큼 그의 마음에 쏙 드는 분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뜬금없이 동질감이 느껴지리만치..
마 비서의 희생적인 보살핌만으로는 분명 채워지지 않는, 부모와 떨어져 이역만리 먼 곳에 - 말하자면 - "유배된"
사춘기 어린 소년의 쓸쓸한 애수가 지수의 처지에선 울컥하고 가슴이 먹먹할 만도 한데, 결코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여유롭게 처량한" 고독 속에서 항상 자유를 맛봐왔던 그였기 때문일까.
마 비서의 조심스러운 중재가 영향을 웬만큼 끼쳤는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적당한 선에서 싫증을 내 준 녀석들한테 도리어 고마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명문인지라 소수 아이들의 철없는 비행은 도를 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상벌 규정 등으로 엄격히
관리가 되는 듯하였고 덕분에 지수는 그 이상의 마음고생 없이 포상을 받은 것처럼 여유로운 외로움을 즐길 수 있었다.
귀국할 때까지 조신하게..
그의 비상한 두뇌로 인해 해외 유학 및 현지에서의 학업에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았음에도
"세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에 대한 죗값을 달게 받고 있는 거라 스스로 암시하며 멋대로 합리화했듯이,
이제는 죗값을 충분히 받았다 멋대로 판단하고서
졸업 후에 자신의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충복 마 비서를 구슬려 총대를 메게 한 다음,
금의환향 퍼포먼스는 본인도 낯간지러웠는지 비밀요원 역할놀이로 만족하며 몰래 깜짝귀국하게 된다.
금지옥엽 늦둥이 막내의 위세는 - 그곳에서 이왕이면 대학까지 마치기를 바라는 - 부모의 기대를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소극적인 지수는 - 본인의 성장 배경 및 환경으로 말미암은 특권의식이 강제 주입된 탓도 있겠으나 - 자신의 장래에 관해서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워낙에 말수가 적어 본인 의사를 표현하거나 의견을 개진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언어 구사력마저 퇴보할 지경이었으니설사 미래에 대한 비전이 문득 떠올랐다 해도 그걸 남한테 털어놓기가 애매하고 쑥스러웠을 것이다.
(독서를 많이 하여 글쓰는 솜씨는 제법 있었지만 함께 늘어야 할 "말하는 스킬"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정체되는 양상을 띠었는데 이것이 균형 잡힌 인격 형성을 방해하지나 않을까 진지하게 걱정하는 어른들은 의외로 거의 없었다. 아마
집안 어른들은 바빠서 그리고 기타 주위 사람들은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으로만 그를 바라봐
꾸준히 연민을 투영하기가 녹록지 않았으리라 추측된다.)
한편, 그의 부모는 내심 그가 의사가 되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비록 달도 다 채우지 못하고 - 팔 개월 만에 제왕절개로 - 세상에 나온 허약하고 왜소한 아들이지만, 머리가 뛰어나고공부에도 (공부가 좋아서라기보단 달리 집착할만한 취미 같은 걸 딱히 못 찾았기에) 열심인 그였으므로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과한 욕심은 아니지 않을까 쉽사리 판단들을 한 모양이다.
대기업을 경영하는 명망 있는 가문인 데다 법조계 인사까지 배출한 (지수의 막내 외삼촌이 지방법원 판사로 재직 중이다.) 집안으로서 이젠 의학박사도 한 명쯤 나올 시기가 되지 않았겠나 하는 아버지의 부푼 기대에부응할 것인가 아니면 저항할 것인가를 놓고 한 번쯤 고민할 법도 한데,
그러한 상식적 반응이 애초부터 지수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다.
무엇이 되고자 하는 바람 자체가 없었던 그는 선택의 여지 없이 부모의 기대와 주장을 따라야 하는 입장이었으나이에 저항하고픈 의욕조차 생기지 않았다. "어른들이 지시하고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의 역할을
별 거부감 없이 맡아 수행할 수 있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였는데,
내면이 상념의 파도로 항시 출렁이고 따라서 머릿속은 하염없이 복잡해져 가는 와중에도
부모와 대립각을 세우는 따위의 대치 국면 혹은 외적인 파행은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았다.
말 많고 탈 많은 사춘기 시절이라지만 지수는 그 시기마저도 부모한테만은 말 잘 듣는 아이로 남기 위해 노력 아닌 노력을 한 편이었다. 하물며 - 철이 뭔지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는 - 성인이 되어서는 일러 무엇하리.
효도라는 이데올로기에 강박적으로 몰입해서도 아니고,
비밀에 부쳐진 "그로선 꽤나 컸던 일탈"이 양심을 후벼 파 끄집어낸 만성 죄책감 때문도 아니었다.
우쭐하여 "햄릿의 우수와 고뇌"에 젖어도 볼 수 있는 특권층 자제의 안락함에 대한
(서민을 표방하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위선적 미안함이, 그를 적어도 외부적으로는 - 사고 쳐서 매스컴에나 오르내리는
이른바 "칠 공자" 이미지가 박히는 걸 발작적으로 싫어하는 - 착하디 착한 기특한 아이가 되게끔 사주한 것 또한 아니다.
평범한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으려 "젠체하며 발악하는" 조로한 자아의 꼬깃꼬깃한 내면이
(근엄함과 매서움의 대명사인 아버지 어머니가 자기 앞에선 심심찮게 무장해제되는) 놀라운 "일상의 기적"에 안도하며,
짧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심리적 오아시스인 줄 알면서도 "퇴행의 진행형"에 푸근히 안겨 - 대뇌 피질의 주름이 싹 펴져
아기 피부처럼 변하는 - "텅 빔"의 수동(受動) 버전이나마 마음껏 충전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지수의 혼란스러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애정 결핍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까지 역행해가며 - "든든함이 태산 같은
부모"의 위풍당당한 자격이 버젓하게 휘두르는 - 강퍅한 자극을 피하지 않고, 나아가
적극적인 무기력(無氣力)을 행사하여 그것에 동조하는 것일까.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추상적인 표현으로 난해한 (그래서 더 어색한) 해석을 해서 그를 애써 변호할 것 없이,
"그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 차고 넘칠 만큼 - 세속적인 인간이다"라고 정의한다면
정녕 가혹한가.
세속적 인간도 평범한 인간의 범주에 들어간다면 그는 태어나자마자 "평범코자 하는 소원"을 이룬 셈인데
굳이 평범하려고 발악하는 건, 세련된 위악에 길들여진 어린 감상주의자의 오버 아닌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히 잘나신 부모와 "물질적 풍요가 상상을 초월하는" 가정환경.
이들에서 기인할 안일함과 안도감을 제아무리 혐오하고 경계한다 한들 "가진 자"의 여유로운 무의식은
곰팡이 같은 권태로부터 "목숨과도 바꿀" 유희를 기어이 찾아낼 것이기에, 그리고
이러한 유희를 발굴하는 데 집중하는 과정에서, 주체적이고자 하는 삶에의 의지 역시
이 유희와의 연장선상에서만 관련하는 편협성을 띠기에,
현실을 생산적 삶으로 채워갈 "인생의 설계도" 따위는 누가 대신 그려 주든 알 바 아니게 될 테지.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주변적 현실에 관한 고민, 자본주의적 타성에 사로잡힌 "삶을 위한 삶"에 관한
내적 고민은 지수의 관념적 유희에 직결되지 않는 - 불필요함을 넘어서 - 방해 요소가 될 뿐이고,
(그의 의식은 검소함을 지향하나) 결코 서민일 수 없는 "그의 사치한 무의식"은
이런 방해들에 대하여 철저하게 의욕 저하 일변도로 반응하는 것일 테지.
미국에서 고등학교만 졸업 후 무작정 귀국한 것에 약간의 죄송함도 있었고 하여, 기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던 순응"은
(주관적 삶의 부수적이라 여겨지는 것들에 대한 귀차니즘에 기반한 무관심성 타협은) 더욱 강화되었다.
IQ180 이상의 지능 소유자이자 멘사 회원인 지수에게 의과대 진학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나 보다.
교과 이외의 (수험 준비와 관련 없는) 책들에 더 몰두하는 그인지라 대학수능시험 공부는 쉬엄쉬엄 했는데도,서울에 있는 대학의 의예과에 보란 듯이 합격한 것이다.
소위 명문대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한 부모였으나, 진작부터 막내아들을 천재라 굳게 믿고 있던 차에
(사교육의 도움이 아주 없진 않았어도) 귀국하자마자 불과 일 년 남짓의 준비 기간을 거쳐
국내의 쟁쟁한 수재들과 경쟁하는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그들의 믿음이 사실임을 증명해 준 지수가
그저 기특할 따름이었다.
당초 의학에 특별한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서전공에 임하는 자가 알아야 할 디테일한 예비 지식이나 정보에 관하여 사전에 그다지 천착하지 않았던 그로서는
대학 생활 적응을 만만찮게 만드는 장벽들과 자주 부딪혀야 했다.
토론과 발표 위주의 학업 풍토도 소심한 그에게 많은 애를 먹였으나, 무엇보다 지수를 경악하게 한 것은다름 아닌 해부실습이었다. 심약한 여성의 성향에 가까운 그가 카데바의 배를 가르다 혼절하는 일 등은,
새삼 놀랄 것도 없는 흔한 일례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쯤 되면 자신이 등한시했던 적성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깊은 후회와 더불어 새로운 진로를 심각히 모색해 볼 법도
한데, 지수는 더 큰 좌절을 잊으려 발버둥 치기라도 하듯 (그것에 비하면 이까짓 소소한 좌절감들은 별것 아니라고
코웃음 치듯) 본인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는 주변적 절망감들쯤이야 실컷 즐겨 주리라는 심리적 매저키스트가 되어
오히려 미련하리만치 의과 공부에 매달렸다.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을 포함하여)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고무적인 견지에서 언뜻 현실 인식 투철한 강한 의지력의 발로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정반대였다.
지수에게 현실과 비현실은 바뀌어 있었다.
그에겐 "비현실에 지나지 않는 현실"의 자잘한 실망, 절망, 난관들이었기에, 그것들은
분투하여 극복할 진정한 "투쟁의 대상"들이 아니었다. 즉 그것들은 그의 껍데기와 함께 인생을 스쳐 갈 뿐이지
그의 핵심이 불가역적 변화를 가하여 함께 끌어안고 갈 것들은 아니란 얘기다. 따라서,
"그의 현실"에만 집중해야 하는 청년 지수에게 비현실이 주는 "심신의 고통"은
그의 천재성(?)으로 능히 커버가 되는 기능적 허상에 불과하였다. 그렇다면,
그를 둘러싼 모든 현실을 비현실의 영역으로 몰아내고 그가 자발적(?)으로 갇혀 버린
"그만의 현실"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해프닝이란 형식을 빙자하여 젊음의 맹랑한 무의식이 영원을 투자할 기세로 맹렬하게 찾아다니는 동질감.
또 다른 코어.
존재로서 존재를 바라봐 줄 "그녀의 우주"를 홀린 듯 또다시 끌어당기면서 동시에 끌려가고 있는,
환상 같은 현실이었다.
화숙이에서 끝났어야 할 "섬광처럼 강렬한 현실"이 더욱 무르익어
비극이라는 장르를 차려입고 끝내 지수와 재회한 것이다. 업보와 악연이 정중하게 이끄는 대로..
이렇게 "한결"이란 존재가 혜성처럼 다가와, 계속 잠자고 싶은 "실존의 비밀"에 조용히 파란을 일으켰다.
이후 그녀의 존재만이 그에게는 절대적인 현실로서 자리 잡게 되었고, 사전적 의미에서의 현실 즉 겉보기 현실은
이후로 줄곧 백일몽과 같은 환영일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의대 생활이 가져다주는 (그에겐 제법 심각한) 굵직한 애로 사항들도 "지수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뜬구름 같은 것들이어서 "그가 선택한 정체성"을 갉아먹는 무기 구실을 하기엔 한참이나 자격 미달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어설픈 빌미를 제공하여 "자신의 소중한 현실"을 침범할 계기를 주게 되는 것이 너무 싫어서,지수는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인 지극히 피동적인 공붓벌레가 되어
"그들이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일" 근거를 원천 차단하였다.
보여주기식 삶의 애로들은 존재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영혼에 대미지를 입힐 수 없다고 장담하면서
그는, "본인의 영혼과도 밀접한 심리와 정서"에 적잖은 위해를 가하게 될 상황들 속으로
거침없이 몸을 던져 나아갔던 것이다.
마치 통증을 느끼는 신경이 파괴되어 각종 질병의 고통이나 사고에 의한 상처를 자각하지 못하는
그래서 더 치명적 상태에 놓인 사람처럼 말이다.
(부모의 특별한 부탁과 수혜에 은밀히 종속된 몇몇 교수들도 지수를 틈틈이 케어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의 건강이 은근히 걱정되기에 따로 그를 불러 친히 상담을 해줄 정도였지만, 정작 본인은 태평하기만 하였고
언제나처럼 "공붓벌레 집단의 가장 으뜸인" 공붓벌레로서 그 위치를 고수하였다.)
이러한 지수의 태도는 - 몸이 조금 더 쇠약해진 것 외에는 - 별 탈 없이 전공에 잘 적응해가고 있다는 믿음을부모에게 충분할 만큼 심어 주었고 본의 아닌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는 셈이 되어, 그 자체로 - 한결을 향해 날아가는
그의 영혼이 "기성세대라는 중력"의 방해를 받지 않게끔 해 주는 - 방패막이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꼭 필요한
불가결의 요소가 되었다.
강한 자의식이 무리없이 밖으로 분출하기도 하고 이를 에너지 삼아, 자신과 견해를 달리 하는 부모에게 적극 항변하기도하는, 보통의 청소년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 하겠다.
그리하기에는 지수의 독보적인 배경과 그의 부모가, 저항이 불가능한 군대와 그것을 지휘하는 오성 장군의 위상으로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무척이나 총명한 지수는, 저 구름 위에 있는 그의 현실을 지상으로 강림케 하기 위해선
무엇이 우선순위에 있어야 하는지를 영리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승산이 없는 거대한 바위에 대적하기보단 이것의 지배하에 들어가 적당히 비위를 맞춰가며
그가 얻어낼 수 있는 최대치를 끄집어내어 그의 비밀스러운 목표 실현에 활용할 뿐이었다!?
남들이 이중적이고 위선적이라 욕해도 어쩔 수 없다.
그가 소유하기로 작정한 "사랑이란 관념"을 획득하고 수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야비해질 수도 있다?!
필요하다면 "세속이라는 부대"의 병정들을 얼마든지 차출하여 그를 겹겹이 에워싸
그의 숭고한(?) 일탈을 지키도록 할 것이며..
이렇게 세속을 부릴 줄 아는 그가 어찌, 세속의 채찍을 맞으며 찌들어가는 일반 청춘들과 비교될 수 있으리..!
고압적인 가부장에 대한 환멸과 분노가 선명하게 도드라져 사춘기의 이유 없는 반항 심리로 고착되기도 하는
일시적 퇴행의 경향이 "대부분의 완벽하지 못한 가정에 속한" 우리네 청소년들의 (아기자기하게 살벌한) 보편적 문제라면, 지수는 그 보편성에서 꽤 많이 벗어나 있는 게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가, 너무 소탈하여 품위와는 거리가 먼 "저들의 아버지들"과는 다른 세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세련되고 기품 있게 고압적이라 웬만해선 반항의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기도 하거니와, 지수의 경우
일시적이란 단어를 갖다 붙이기가 멋쩍을 만치 애초에 퇴행의 기원이 더 거슬러 올라가 거의 유아기에 고착되었으니
아버지가 합당한 분노를 유발한다 한들 이를 향하여 거부감을 표출할 추진력부터가 아예 생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뒤틀린 사회가 길러 낸 기형적 존재일 수도 있겠다는" 동정의 시선을 줘야 할지 거두어야 할지 노선을 분명히 정하려면
아무래도 그의 인생 행보를 더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다.
현재 진행되는 상황만으로 비춰 볼 때에는, 추후 지수가 착한 주인공의 자격을 득할지
비틀어진 악인의 낙인을 얻게 될지 - 명확하고 정당한 - 판가름이 어려울 것 같으니까.
먼저, 빼도 박도 못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상
선인과 악인의 판별에 적용될 (내면까지 아우르는 복잡한) 기준은 언제나 모호할 것이고,
(이론적으로나 가능할) 어마어마한 배경으로부터 완벽히 독립한 개체가 되지 않는 이상
그는 세인의 편견과 오해에서 비롯되는 억울한 비난을 결코 피할 수 없을 운명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예정된 파국"이 기다리고 있을 미래에는 어떠할까.
세상은 그에게서 알량했던 면죄부마저 매몰차게 앗아갈 것이므로, 농축된 비판만 역사 속에 오롯이 남겠지.
혹여 미래의 가변성이 "앞날의 극단적 사건"을 비켜 가게 만든다면 또 모를 일이다
신성한 무한 삶의 최종 판단이 과연 그의 손을 들어 줄 것인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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