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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오공자(五公子)
    지수 이야기/스토커? 스토커! 2024. 9. 27. 13:28

     

     

     

     

     

     

     

     

     

     

     

     

     

     

     

     

    공부하는 척이 아니라 진심 공붓벌레였다.

     

    어렵다 하는 원서나 전공 서적들도 독해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고

    이해가 되든 안 되든 내용을 달달 외우는 것엔 이전부터 자신이 있던 지수였다. 그렇게 본인 특기를 살려

    타인들과 자기 자신마저 속여가며 그는 심리적으로 안정된 가운데 자기만의 세상을 자각몽을 꾸듯 가꿔나갈 수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대로만 쭉 나아갔으면 바랄 것이 없겠다 싶었는데

    그가 거부하는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그가 대부호의 손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그들끼리의 세상"에서 통용되는 (그리하여 가진 자들의 권리이자 의무로서 강요되는) 문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를 거부할 시 - 그가 지키고자 하는 - "그의 영역" 또한 붕괴될 위험에 봉착할 수 있으므로 지수는,

    "그의 성격상 - 조금 과장해서 - 죽기보다 싫은" 몇 가지 일들에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참여해야만 했다.

     

    그러한 일환을 예로 들자면, 공부에 전력을 다해도 부족할 시간을 쪼개어

    "부모가 고심 끝에 물색한" 정혼의 후보들을 만나 본다든가

    (부모들이 지원하는) 부유층 자제들의 정기적인 사교 모임에 참석한다든가 등이 있겠다. 후자의 경우

    반드시 건설적이고 건전한 성격을 유지한다는 보장은 없으나 윗대부터의 관행이기도 하고 또

    이런 류의 모임이 후일 서로의 이익에 자연스럽게 기여하는 바 있어서, 어른들은

    성인인 자제들이 가끔씩 행하는 자유분방한 비밀 놀이 정도는 묵인해 주는 편이었다. 본인들도 그랬듯이..

     

     

    당신 뜻대로 의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열심히 밟고 있으니 이제는 그냥 평소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게 가만히 내버려 두셨으면 좋겠건만,

    쉬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기계처럼 공부에 매진하는 모습이 (지수의 퍼포먼스가) 과하다 느끼셨는지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스러워 당신들 딴에는 - 과부하 걸리지 않게 틈틈이 머리 좀 식히라는 - 배려 차원에서

    상기 모임의 참석을 종용하셨다.

     

    경영 일선에 나가지 않을 예비 의학도임에도 그런 모임에 등 떠밀리듯 나가야 했던 게

    바로 이런 (걱정과 배려라는) 표면적 이유 때문이었으나, 당장 거기 갈 수 있는 또래의 자식이 지수밖에 없기도 하고

    뭐든 정보와 관련된 쪽으로는 선을 대야 직성이 풀리는 프로 의식이 발동,

    겸사겸사 그를 거기로 내몰다시피 한 게 아닌가 사료된다.

     

    어쨌든, 본디 공붓벌레 기질이 농후했던 그의 무사안일적 "공붓벌레 작전"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다가 "예상치 못한 부작용" 하나를 툭 던지는 순간이었다.

     

     

     

     

     

     

     

     

     

     

     

     

     

     

     

     


    도련님, 혹시 핸드폰 꺼놓으셨습니까?

     

     

     

    학교에선 꺼놓는다고 했잖아. 알면서 왜 물어봐?

    왜요..? 삐삐로 연락 주고받는 거 번거로워서 그래?

     

     

     

    B그룹 자제분께서 도련님과 연락이 안 된다고 제게 전화 주셨습니다.

     

     

     

    걔한테 얘기 안 해 놨어?

     

     

     

    그럴 리가요.. 자제분들께는 다 미리 통보해 두었지요.

    실제로 꺼져 있나 확인하고 전화하셨다 합니다.

     

     

     

    아, 귀찮은데..

    보나 마나 모임에 나오라는 얘기겠지? 아저씨가 대충 둘러대면 안 될까?

     

     

     

    저도 그러고 싶지만 결국은 다른 자제분을 통해서 사모님 귀에까지 들어갈 게 뻔한 일이라..

     

    죄송합니다. 오늘은 스터디 활동이나 도서관 가는 것 미루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네 시에 모시러 가겠습니다.

     

     

     

     

     

     

     

     

     

     

     

     

     

     

     

     

     

     

    너 이 자식, 삼십 분이나 늦게 온 주제에 표정이 그게 뭐냐?

     

     

     

    ................

     

     

     

    그 지나치게 듬직하신 보디가드가 데려다 줬는데도 지각인 거냐? 물론 네가 늑장을 부리니 별 수 없었겠지만..

     

    그리고 너도 이제 스물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저리 달고 다녀야 안심이 되냐?

    옆에 두고 잔소리나 들을 거면서 귀찮지도 않아? 하여간 아직 애라니까 쯧쯧..

     

     

     

    잔소리는 형이 하고 있잖아?

    나이도 몇 살 차이 안 나면서 답답한 어른 흉내 그만 내고 그냥 하던 대로 하시지?

     

     

     

    어쭈, 몇 번 만났다고 제법 대담해졌네? 받아칠 줄도 알고..?

    왜.. 우리 집이 너네 집보다 못하다고 너까지 이러는 거냐? 이거 좀 섭섭해지는데?

     

     

     

     

    으이그, 유치하게 갑자기 무슨 집안 타령이야? 찬이 형답지 않게..

     

     

     

    그래, 나 유치한 거 이제 알았냐?

     

     

     

    나 다음 주 유학 간다고 송별회 겸 모이는 거 아니었어?

    초장부터 분위기 이렇게 잡을 거야? 내가 주인공인 자리라며?

     

     

     

     

    어, 준석아..

    너 곧 유학 떠난다는 얘긴 상학이한테 들었다. 상학인 아직 안 온 거야?

     

     

     

    안 오긴..

    잠깐 화장실 갔지.

     

     

     

     

     

    약속 장소는 이번에도 VVIP 전용 회원제 룸살롱 "필라델피아"였다.


    꽤나 널찍한 반면 조도는 낮추어 어두컴컴한 룸 안을, 귀에 익지 않은 재즈 발라드와 담배 연기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송별회를 명분으로 모였을 뿐 실상은,

    그들의 권태로운 유희가 별것 없을 흥미를 억지로 쥐어짜 내려는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한두 번의 체험만으로도 이것에 진저리가 날 지경이던 지수였기에 이러한 성격의 모임을 마뜩지 않고 시큰둥하게

    대하는 건 그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다시 모인 대단한 집 자제 4인방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벌써부터 테이블 한가득 세팅해 놓고

    백만 원 가까이 되는 고급 양주를 홀짝이는 중이었다.

     


    지겹게 흘러가는 이러한 시간이 아까울 따름인 지수였다. 소주 한 잔 목구멍으로 넘기기 힘든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첫 회동에서 - 자신들보다 더 까탈스럽게 구는 것 같아 - 일종의 기선 제압용으로 양주 한 잔을 강권하였다가 겪은

    난리 블루스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지는 친구들이었기에, 그의 근처에는 술잔조차 갖다 놓지 않았다.

     

     

     

     


    형주 형은 한국에 이렇게 오래 체류해도 되는 거야? 영장 나오면 어쩌려고?

     

     

     

    상학이 너 시방, 나랑 농담 따 먹기 하겠단 거지? 나 시민권자잖아 이놈아.

     

     

     

    헤헤 자꾸 깜빡하네.. 미안, 형.

     

    음악 작업이 많이 길어지나 봐? 아무튼 형 음악적 재능 참 부럽단 말이야.. 아무리 취미라지만 거의 프로급인데

    이런 활동 허락해 주는 형 아버지도 대단하시고 말이지.

     

     

     

    후후, 우리 아버지가 그런 방면으론 또 관대하시지.

    물론 내가 딴따라로 직업 삼을 생각 없으니 안심하시는 것도 있고..

     

     

     

     

    야, 시시껄렁한 소린 집어치우고!

    형주 너 인마, 연락은 잘 해 놓은 거야?

     

     

     

    하, 민찬이 형 성미 급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여기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 자식이 또 개기네..? 네가 이러니까 애들이 보고 배우는 거잖아!

    인마, 그거 비싼 시계라 장식으로 차고 있는 거냐? 한 시간이 다 돼 가는데, 내 성미가 뭐??

     

     

     

    알았다고요! 다시 연락해 볼 테니 잔소리는 거기까지!?

    하여간 나이는 제일 많아서 체통 없이 껄떡대기는..

     

     

     

    햐, 이 새끼 보소? 애들 앞에서 감히 이 정민찬이를 꼽주네?

    너 오늘 물 안 좋으면 알아서 해, 확!

     

     

     

    어휴 벌써 취했네 취했어..

    내가 언제 형 실망시킨 적 있어? 헛소리 그만하고 점잖게 기다려 봐.

     

    야, 너희들도 아직 애인 안 키우지? 오늘은 다들 부담 없이 즐기는 거다?

    특히 준석이 너, 바다 건너 가면 오늘이 그리워 미칠 만큼 뜨겁게 보내야 해?

     

     

     

     

    형도 참..

    우리가 그러려고 모인 건 아니.. 지만 형이 그렇게까지 해 주신다면야 고맙습니다. 히히..

     

     

     

     

    헤이 꽁생원, 넌 어떠냐?

    지난번처럼 재미없게 굴지 말고 이따가 애들 오면 잘 좀 하자?

     

     

     

    나 애인 있어. 급한 형들이나 재미들 많이 봐요.

     

     

     

    뭐 그.. 정혼 후보감들 얘기야? 순진한 녀석이네..

     

     

     

    아니, 숨겨 둔 애인 있다고..

     

     

     

     

    지수 넌, 그걸 조크라고 던지는 거야? 참 너답다 야, 썰렁해 가지고는..

     

     

     

    응, 조크 아니야.

     

     


    .................

     

     

     

     

    공부만 들입다 파는 놈이 고새 CC라도 만든 거냐? 하기야 얌전한 고양이도 부뚜막엔 잘만 오르니까..

    네가 아직 어려 잘 모르는 모양인데 우리 같은 신분은 항상 입조심이 철칙이란다. 낮말 새 밤말 쥐 몰라?

    막말로 이 안에도 믿을 놈 없어. 스캔들 터지면 낭패 보는 건 너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 테지?

     

     

     

     

    찬이 형, 왜 또 겁주고 그래? 순진한 애 모처럼 연애 좀 하겠다는데.. 흐흐..

     

    지수야 우린 많이 젊잖니? 대외적인 행실만 기본으로 유지해 주면 경험은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이런 우리만의 아지트에서 극비리에 가끔씩 스트레스 해소차 일부러 망가지는 것 말고, 개인 실생활에서도 말이다.

    웬만큼 상대 수준만 맞춘다면 결혼 전에 연애 좀 한다고 손해 볼 건 없단 얘기지. 우리가 조금만 조심하면 돼.

    매번 걸리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발각돼서 매스컴에 오른다 해도

    우리가 떳떳하다면 그건 정상적인 사랑이지 스캔들은 아니잖아?

     

     

     

     

    누가 누구한테 순진하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네.

    형주 너 정말 그리 생각하는 거냐? 찌라시 날리는 기레기들이 스캔들 제조기인 거 몰라서 하는 말이냐고!

     

    지수야 너 애인 있다는 거 사실 아니지? 우리랑 어울리기 싫어서 꼼수 부리는 거 아니야?

    의대 동기나 선후배 정도면 몰라도 수준 떨어지는 애들 예컨대 무명 연예인 또는 그쪽 지망생 같은 부류랑 잘못 엮이면

    넌 좆되는 수가 있다. 명심해.

     

     

     

    ...............

     

     

     

     

    아이고, 형, 나 좀 찔리는데? 오늘 오는 애들 중에 딱 그런 애가 한 명 있거든. 지망생..

     

     

     

    인마, 걘 여기 알바하러 오는 거고.

    재미도 우리의 비밀 아지트인 이곳에서 볼 건데 뭐가 걱정이야?

     

     

     

     

    접대하러 오는 여자들, 믿을 수는 있는 거죠?

     

     

     

    왜.. 갑자기 쫄리냐? 여기 올 때마다 제일 질펀하게 노는 녀석이..? 걱정 말고 편히 놀다가 유학이나 가, 자식아.

     

    입에 자물쇠 채우는 대가로 선입금되는 기본 봉사료 자체도 세고 거기에 팁을 또 어마무시하게 얹어 주잖냐.

    게다가 걔네들, 발설하면 골로 간다는 각서에 사인하고 오는 애들이다.

     

     

     

     

    그렇더라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너희들 걔네랑 놀 때 불필요하게 떠벌리진 마. 알았지?

     

     

     

    예썰! 그 소리 한 번 더 하면 백 번이옵니다.

     

     

     

    으휴, 저 고리타분한 과장법 시키..

     

     

     

     

    자자, 각설들 하시고..

     

    애인을 몰래 키우든 대놓고 만나든 간에 오늘 같은 날은 잠시 그녀들을 잊고 우리끼리 쏠쏠하게 재미 좀 보세나. 친구들?!

    그런 의미에서 거국적으로 일단 한 잔씩 해.

     

     

     

     

     

    그 멘트를 기다렸다는 듯 지수를 제외한 나머지의 손들이 온더락스 잔으로 동시에 옮겨 갔다.

    이렇듯 잔을 들 명분만 생기면 기꺼이 건배를 반복할 정도로 그들의 젊은 위장은 독한 양주에 길들여진 모양이다.

     

     

     

     

     

    한결이라고 알아?

     

     

     

     


    밑도 끝도 없이 툭 내뱉은 말에 다른 네 명은 잠시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야, 우리나라에서 한결 모르는 놈도 있냐? 그런데, 뚱딴지같이 한결은 왜??

    너 혹시 한결 좋아하냐?

     

     

     

    여자 친구가 한결 닮았거든..

     

     


    그래? 그렇게나 예쁘다고? 그럼 요다음 모임 때 한번 델꼬 나와 봐. 우리도, 한미모 하는 니 여친 구경 좀 하자.

    정말 한결하고 닮았는진 우리가 보고 나서 인정하든지 할게.

     

     

     

     

    지수 너 인마, 쥐뿔도 없으면서 괜히 허풍 까는 거 아니야?

    여자는 개뿔.. 난 저놈 하는 말 도통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저렇게 좀생이 짓이나 하는데 어떤 여자가 붙겠어?

    진짜 넌, 널 낳아 준 부모님께 두고두고 감사해라.

    재벌가 자식 아니면 그 체구에 그 성격에 참 잘도 가시나 만나고 다니겠다.

     

    얘들아, 너흰 이 녀석 하는 말이 믿기냐?

     

     

     


    아니 형은, 지수가 뭔 말만 하면 별것도 아닌 것에 날을 세우더라?

    명색이 재벌집 손자에다 의대생인데 쟤가 마음만 먹으면 한결 같은 애 하나 못 만나 보겠어?

     

     

     

    아니 그러니까, 쟤가 그런 마음을 먹을 놈으로 보이냐고!

     

     

     

     

    에휴, 또 싸워 형들? 지수 표정 심각한 걸로 봐선 허튼소리 같진 않은데?

     

    야, 너 한결 짝사랑이나 하는 그렇고 그런 못난 놈들 중 하나는 아니겠지?

    저 형들 의 상하지 않게 다음엔 꼭 여친 데리고 와야 쓰겄다.

    그럴 수 있지? 제발 그럴 수 있다고 말해 줘..

     

     

     

     

    글쎄.. 그게..

    알게 된 지 며칠 안 돼서 말이야.. 여기 데려올 만큼 친해지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서..

     

     

     

     

    저것 보라지. 결정적일 땐 저리 꼬리를 내리는데 말 다 한 거 아니야? 신뢰가 가겠냐고.

    기대도 하지 마 그냥..

     

     

     

     

    소심하기는..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친해지냐? 기횔 잡아서 적극적으로 대시도 하고 그래야지.

    그나저나, 그 정도 퀸카를 어디서 구한 거야? 의예과에 그런 여자가 있을 리는 없고.. 이것도 편견인가? 어쨌든,

    그래서 걔는 네가 좋대?

     

     

     

    나도 잘.. 모르겠어..

     

     

     


    내 말 새겨들어! 인마, 퀸카를 잡으려면 너부터 킹카가 되어야 하는 거다.
    빽만 믿고 있다가는 - 잔챙이들은 건질지 몰라도 - 백날 가야, 정신 올바로 박힌 "퀸카다운 퀸카" 얻기 힘들단다 알겠냐?
    남자로서 기본은 되어야지. 안 그래도 변변찮은 체격으로 그렇게 골골대기까지 하면 누가 좋다 하겠어?

     

     

     


    형이야말로 고리타분한 이야기 그만 좀 해. 한결 닮은 애 만난다니까 괜히 질투 나서 그러는 거야?

    정신이 바로 박힌 퀸카? 결혼을 전제로 사귀게 될 여자라면 어른들이 어련히 알아서 데려다 놓으실 텐데

    우리가 굳이 그딴 거 신경 쓸 필요 있어? 결혼이란 족쇄에 묶이기 전까지 우린 그저 즐기면 되는 것 아니야?

    오늘처럼 돈으로 쾌락을 사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형도 잘만 그러면서 왜..?

     

     

     

    야, 야, 당사자인 지수는 잠자코 듣는데 형주 니가 왜 열 내고 난리냐. 제3자는 빠져 있어!

    그리구 말은 똑바로 하자. 배경에서 약간 밀릴진 몰라도 사람만 놓고 보면 내가 꿀릴 게 어딨어? 이건

    너희들도 인정하잖아? 사실이 그러한데 뭐가 아쉬워 내가 쟤를 질투하냐. 참 나..


    또, 이 형님이 아끼는 인생 후배님한테 진심 어린 충고를 한 건데

    아무리 밴댕이 소갈딱지라 해도 그걸 고깝게 생각하면 안 돼. 그러면 벌받아!

    안 그러냐, 지수야?!

     

     

     
    .................

     

     

     


    흠, 내 말이 틀린 데가 없으니 대꾸를 못하는구먼.

    좋아, 그럼 한마디만 더 하지.

     

     

    지수 너한테도 이상형이란 게 있을 거 아니냐? 그게 한결이라면 걜 닮은 애로 만족할 게 아니라

    진짜 한결을 꽉 잡아야 할 것이고.

     

    우린 말이지, 이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능력자들 아니냐?

    이상형은 이상형일 뿐이다 포기하고 현실에선 끼리끼리 분수에 맞는 상대랑 합쳐지는 세상 평민들과 우리가 같아?

    네가 한결과 같은 딴따라를 책임질 자신이 있으면 사내답게 밀어붙여. 목표물 획득을 위한 치밀한 전략을 지금부터 세우라고!

     

    마스크는 그만하면 뜯어고칠 필요는 없겠고..

    오늘부터 당장 헬스라도 시작해라! 몸이 그게 뭐냐? 삐쩍 말라 갖고..

    몸집 불리고 근육 좀 키우면 지금보다 열 배는 자신감이 붙을 거야. 공부하는 틈틈이라도 운동을 꾸준히 해 주면

    혈색부터 좋아지고 키까지 커질 수 있어, 알겠어?

     

     

    또 책임 좀 못 지면 어때? 우리 같은 부류가 언제부터 조강지처만 바라보고 살았냔 말이지.

    상대가 너 하나만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하면 그 개소린 사뿐히 즈려밟아 주시고.

     

    이해타산에 맞으니까 결혼한 거고 그 이해타산이 그녀의 평생을 지배한다면 네가 한눈파는 것쯤 대수롭지 않게 넘길 거다. 단, 그녀의 이해타산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그게 무너지면 그때부턴 인정사정없이 너와의 자폭을 불사하고도 남는 족속이니까.

     

    표피적인 이상형에 영혼을 팔았다면 그 부실한 선택에 대한 (어르신들의 반대를 무릅쓴 것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네 몫이야. 그러니 이상형의 난잡한 이면(裏面) 정도는 당연한 듯이 끌어안고 살아야겠지?

     

     

     


    아주 일장 연설을 하시는구만.

    지수야 넌 좋겠다. 이처럼 너한테 관심과 애정을 팍팍 쏟아 주는 오지랖쟁이 형이 있어서.

     

    얘 부모가 형한테 한 수 배우고 가시겠어. 꼰대도 이런 꼰대가 없네..

    찬이 형 그거 알아? 형의 그 장황한 요설에 모순이 있다는 거? 일관성은 밥 말아 자시었소?

     

     

     

    뭐 인마?

    그래, 오늘 술발 좀 받아서 헛소리가 술술 나온다. 어쩔래?

     

     


    그리고 형이야 남는 게 시간이겠다 심심할 때 운동만 해서 그렇게 벌크업이 돼 있는지 모르겠으나

    지수가 어디 형하고 같아? 얘는 체질적으로 근육질이 될 수 없는 몸이라고!

     

     


    형주 너야말로 무슨 근거로 그리 단언을 해? 흐흐, 자식이 위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까네?

     

    지수야 말해 봐라. 누구 얘기가 더 기분 나쁘냐?

     

     

     

    .....................

     

     

     

     

     

    민찬과 형주의 설전이 점입가경의 양상으로 발전(?)해 가려던 차에 도어가 열리고

    "형주의 전속이 되다시피 한" 보도 실장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옆으로 다가가 귀엣말을 하였다. 

     

     

     

     


    여러분, 뭣 같은 분위기 바꿀 때가 드디어 되었군요. 도착들 하였답니다.

    자, 애들 들어오면 얼굴들 밝게 펴고 신나게 놀 생각만 하자고! 오케이?

     

     

     

     

    형, 꼭 이렇게까지 놀아야 돼?

     

     

     

     

    야, 저번처럼 초칠 거면 안 잡을 테니까 조용히 꺼져!

    우린 뭐 아쉬워서 너랑 엮이는 줄 알아? 니 부모 부탁도 있고 해서 끼워 줬더니 갈수록 가관이네.

    이 모임에서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허허, 이러면 곤란해 지수 군. 우리 조달 담당께서 숫자를 딱 맞춰 준비해 놓았으니까 토 달지 말고 "꼼짝 마라"다. 알겠니?

    너도 좆 달린 사낸데 아닌 척해 봤자 니 아랫도린 이 순간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을걸? 좋으면서 내숭은..

     

    봐 봐, 지난번 네 파트너가 "금테 안경 벗으니 더 미남이라며" 아부 떠니까 오늘 렌즈 끼고 왔네?

    장족의 발전이야! 후후..

     

     

     

     

     

     

     

     

     

     

     

     

     

     

     

     

     

    저녁 여섯 시경.

     

     

    미모가 출중하면서도 도도하지 않고 적당히 풋내 나는 싱그러운 과일 같은 여성들이 조신한 자세를 유지하며 들어왔다.

     

    늘씬한 모델급 몸매에 살짝 웨이브진 (가지각색의 빛깔로 물들인)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얌전한 듯 당당하게 걸어오는

    아가씨들 중에 짧은 파마머리의 무척 깜찍한 그러나 미모 면에서 전혀 뒤지지 않는 아가씨가 하나 섞여 있었는데,

    상당한 동안이라 마치 언니들과 함께 온 십 대 어린 소녀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다 해서 쭈뼛대며 키 큰 언니(?)들 틈에 숨는 약한 모습은 아니었으며,

    앞장서서 나머지 네 명의 아가씨들을 리드하는 듯한 의외로 당차고 명랑한 느낌을 발산하고 있었다.

     

     

     

     

     

    다들 주목!

     

    이 분야 탑을 찍고 있는 우리 강남 언니들이 이제야 오셨습니다. 공주님들 수급 책임자로서 이 점 우선 유감을 표하며

    저를 포함 우리 다섯 공자님들은 지금부터 알아서들 초이스 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형님부터?

     

     

     

    촌스럽게 마이크는 들고 설치냐.

    그리고 손님 대접이 왜 그래? 공주님들께서 우릴 고르는 게 이치에 맞지, 이 사람아!

     

     

     

    아하,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금 실장은 나가는 길에 밴드 들어오라 하고?

     

    에, 그런데 저기 한 분은 예외가 될 것 같습니다. 아담하고 귀여운 너무도 앙증맞아 깨물어 주고 싶은 저 아가씨는

    제가 특별히 임자를 미리 정해 두었답니다.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것 같아서 말이죠.

     

     

     

     

    오빠! 나 서운해. 왜 다들 공준데 나만 아가씨야? 나 졸지에 무수리 된 거야? 흥!

     

     

     

     

    하하, 보시죠. 저 똑 부러진 목소리부터 귀엽지 않습니까?

     

    예, 짐작들 하시겠죠? 아담한 사이즈부터 해서 우리의 지수 군과 여러모로 잘 맞을 것 같지 않나요?

     

     

     

     

    지수야, 너 오늘 임자 만난 거 아니냐? 흐흐..

     

     

     

     

     

    얼굴 전체가 벌겋게 달아올라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지수를 여자의 본능으로 캐치하고,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날리는 그녀였다.

     

     

     

     

     

    척 보면 아는구만. 그래, 잘 모셔라.

     

    여러분, 이 아이로 말할 것 같으면.. 아니지 직접 소개해 보거라.

     

     

     

    KP 엔터테인먼트의 유망주 연습생 민희라고 합니다. 미니 사이즈 체구 때문에 애칭은 "미니"고요. 발음이 같죠? 호호.

    하여간 잘 부탁드립니다. 특히 파트너 오빠..

     

     

     

    오냐, 그럼 민희는 저 "꿔다 논 보릿자루" 옆에 가서 앉으면 되고..

     

    나머지 퀸카 아가씨들도 어서 오늘의 파트너를 골라 보시지요?

     

     

     

     

     

     

     

     

     

     

     

     

     

     

     

     

     

    테이블 주변의 공기는 완전히 미팅 분위기로 돌변하여 후끈 데워진 지 오래였다.


    간단한 상견례(?)를 마치고, 이번엔 상학이가

    본인도 지기 싫다는 듯 또 한 잔을 위한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며 치고 나왔다.

     

     

     

     


    우리의 소중한 손님, 아리따운 다섯 아가씨들을 위하여!!

     

     

     

     

     

    연예인 기질이 다분한 형주가 걸쭉한 입담과 막힐 줄 모르는 재담으로 좌중을 휘어잡았고, 민찬과 준석이

    심심찮게 추임새를 넣어주는 가운데, 분위기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자리가 언제나 불편하기만 한 지수는 여전히 얼굴을 붉히며 한 번 떨군 고개를 좀처럼 들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 "속물적 언행에 대한 잘난 체하는 냉소"로써 본인의 주체할 수 없는 (대인관계에서의)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간신히

    무마하곤 하였으나, 이성(異性)이 등장하는 이런 자리는 빈도의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적응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재벌 총수의 손자답지 않게 순진한 건지 어리숙한 건지 별종처럼 구는 지수한테서 호의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던 이성들은 대개가 - 그의 재력이나 배경에 대한 끌림은 기본이니 논외로 하고 - "모성 본능이 무의식을 많이 차지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순수한 베풂이라기보단, 자기만 못하게 여겨지는 약한 상대가 남성일 경우 우월감이 연민으로 종종 순화되어 - 이성에게서 느끼는 긴장과 부담이 사라진 채 - 그를 인간적으로 보듬어

    주고 싶게 만드는 감정 말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이성으로서 최소한의 호감을 그가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민희 또한, 말괄량이 성향이 살짝 보이는 성정 안에 이런 유형의 모성 본능을 적잖이 감추고 있는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내면 속에서 개성 있게 변형된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조건 없이 마음을 열게 하는 정통적 모성이 아니라

    개구진 호기심을 충족해야만 그녀가 조금씩 내어 주는 철저한 조건부 모성이었다.

    결국은 "여자라는 정서(情緖)"의 기본적 온화함이 그녀에게서도 튀어나와 지수를 감싸고 적실 테지만 그때까지는,

    자신 앞에 나타난 귀한 장난감이 그저 신기방기하여

    요리조리 살펴보고 유심히 관찰도 해보고 나아가 한 번씩 툭툭 건드려 봐야 직성이 풀릴 태세였다.

     

     

    지수에게는 감당하기 어렵고 난처한 스타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자신을 유들유들하게 대하는

    저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얄미워서 혼꾸멍을 내주고 싶은 지경이었지만 마음만 굴뚝같을 뿐

    실제로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소심함과 무기력함이 그를 어지러운 혼돈 속에 잡아 가두고 있었다.

     

    "그래도 사내"인데 얼마나 얕보였으면 새파란 여자가 저리 자신만만하게 나올까 하는 추레한 자격지심 때문인지

    너무 화가 치밀어 심신이 다 떨려왔으나 - 머릿속으로는 온갖 복수(?)를 궁리하면서도 - 겉으로 행동은커녕

    말 한마디 섞어 따질 수조차 없는 스스로가 경멸스러울 따름이었다.

     

    얼굴 좀 반반한 여자 앞에서는 그렇게 무장 해제 되고 마는 아니 해제될 무장도 변변히 준비되지 않는 그였다.

    이성을 과하게 의식하지 않고 세련된 멋진 매너로 자신의 발아래 그녀들이 알아서 기도록 하는

    상남자를 꿈꾸지만, 상상은 자유요 연애의 현실은 가혹하였다.

    "능력이 아닌 재력"으로 우쭐대며 사랑과 쾌락을 구별하지 못하는 (마초인 척하는) 부자연스러움을 몹시 혐오하기에

    지수는, 풍요 속 빈곤인 양 본인이 겪고 있는 이 저주 같은 "바보 같음"이 더욱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후천적인지 선천적인지는 중요치 않은 "연애 능력 결핍 증후군"에 걸린 다수의 세상 범부들한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소식이지 않을까? 지수와 같은 소위 - 자본주의의 정점이 배출한 - "신의 아들"도

    본인들의 병과 다름없는 증세를 보이며 고생(?)하고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저 꼭대기 층에는 본인들에게 동질감을 선사할 "바보 지수" 같은 돌연변이가 대단히 희소하여

    그 미약한 통쾌함으로는 그들이 꾸준한 위안으로 삼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리라.

     

     

     

     

     

    자, 저도 이제 입이 아파 죽겠네요. 사회자 놀이 하며 너스레 늘어놓는 건 슬슬 이쯤에서 그만둘까 하는데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우리 친애하는 커플들, 단체 미팅이 지겨우실까 봐 두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비밀의 방"들을 따로 마련해 놓았으니

    원하시는 분들은 지금 일어나셔도 좋습니다.

     

     

     

     

     

    '설상가상은 이 상황을 두고 하는 표현이겠지. 점점 잠식해 오는 불안을 친구(?)들의 들뜬 흥분 속에 묻어서 겨우 버티고

    있었건만, 다른 아무도 없는 둘만의 공간이 준비되어 기다리고 있다니 대체 이 무슨..

    지난번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정말 나를 고문이라도 하려고 단단히 작정한 것인가?

    이리되면 불안은 패닉으로 급가속될 텐데.. 이것 참..

     

    얘는 또 왜 이래? 부담되게..

    갈수록 태산이네 진짜..'

     

     

     

     

     

    민희의 노골적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지수의 얼굴은 - 붉음의 끝은 어디인가 싶을 만큼 - 짙게 붉어져만 갔다.

     

    첫날부터 콩깍지도 아닌 것이, 이런 모습에 정떨어지지 않고 귀여워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특이한 취향도 참 신기하고 이채롭다.

     

    (이 부분에서, "취향"이란 단어가 인간 존재를 향하여 사용되는 게 부적절하다면

    그녀의 "장난기 어린 담백한 성애(性愛)"와 관련된 그러한 취향을 가리키는 정도로 해석하자.

    이렇게 전제하지 않으면 주인공 지수는 몹시 서글퍼질 것 같다.

    그녀가 여기에 불려 온 자체가 시사하는 바는 사실 뻔하기 때문이다.

     

    돈이라는 목적은 어차피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것이고 이를 기반으로 - 상대가 상대니 만큼 - 혹시나 하는 행운도 노리는

    와중에 진심 친근감을 표하는 장난기가 그녀의 성격상 습관처럼 천진하게 발동하였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야,

    덜 삭막하고 조금은 낭만 냄새나는 "남녀 한 쌍의 스토리"를 미흡하나마 기대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 오빠, 왜 이리 부끄럼이 많을까.

    예쁘고 깜찍한 내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이러는 거, 다 알아요.

     

    오빠 귀에 대고 오빠만 들을 수 있게 얘기해 줄게.

    "나도 다른 활발한 오빠들보다 오빠가 더 좋아."

     

     

     

    너랑 정반대일 것 같으니 잠깐 별나 보이고 신기해 보이는 거겠지..

     

    억지로 감정 이입할 필요 없어.

    너 실망하지 않을 만큼 팁은 두둑이 챙겨 줄 테니 걱정 말고 편하게 놀다 가.

    나, 여자 불편하게 하는 사람 아니야.

     

     

     

    멋져! 오빠.

    그런데 어쩌지? 내가 오빠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은데.. 그럼 안 될까?

     

    오빠랑 나랑 둘이서 재밌게 놀자. 응? 우리만의 방에서 우리끼리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용기 내어 정면으로 그녀를 쳐다본 지수의 시야에 처음 들어온 것은,

    그녀의 눈가에 곧 쏟아져 내릴 것처럼 가까스로 매달려 있는 "미소답지 않은 미소"였다.

    함박웃음으로 변하여 터져 나오기 직전인, 미소의 기능을 상실한 괴이한(?) 미소였다.

     

     

     

     

     

    '뭐 하자는 거지? 정녕 나를 가지고 놀겠다는 심보인가? 이런 괘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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