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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숙이지수 이야기/이상한 누나 2023. 6. 12. 20:57
벌렁 나자빠지면서 뒤통수를 벽에 찧었는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 오만상을 찌푸리는
도깨비의 입에서 성질 더러운 계집애의 앙칼진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졸지에 컬트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지수의
경련하던 위장은 그만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엑소시스트"의 한 장면을 멋지게 재현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악마의 진액인 푸른색 토사물을 뿜어 올릴 절묘한 타이밍에 도달하였다.
(이것은 비몽사몽의 환상 속에서 우쭐대는 위장의 소망일 뿐 실제로는
단순히 위액과 음식물 찌꺼기의 지저분한 콜라보가 현실을 망쳐 놓을 태세를 취하는 것에 불과했다.)
야! 너 왜 그래?!어맛!? 얘 눈알 뒤집어지는 것 좀 봐.
야, 아직 안 돼! 여긴 내 방이란 말야.조금만 참아! 알았지?!
여자가 미닫이문을 열고 후닥닥 뛰어나가는가 싶더니 불과 십여 초도 안 걸려 큼직한 플라스틱 대야를 들고 나타났다.(실로 비호 같은 몸놀림이다.)
옜다! 여기다 니 맘대로 싸질러라.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두어 번 헛구역질을 하던 지수는
여자가 던져 준 대야를 부여잡고 본격적인 "위장 뒤집기" 한판에 들어갔다.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요런 붕알도 여물지 않은 녀석이, 명절 댓바람에 술 퍼먹고 갈보집엘 다 안 쳐들어오나..
말은 이리 하면서도 여자는, 다 내려간 똥물까지 기어이 퍼 올리는 지수 옆에 쪼그리고 앉아그의 등을 연방 쳐주고 있다.
뒤에서 보면 어린애들이 소꿉장난하는 것처럼 여겨질 만큼 여자의 몸집도 지수 못지않게 작았다.
한참을 인간 펌프가 되어 에너지를 소진한 지수는 - 허수아비가 바람에 넘어지듯이 - 탈진하여 모로 쓰러져 버렸고,여자는 대야를 치운 다음에도 다시 그에게 다가가 젖은 수건으로 입가를 닦아 주었다.
화숙이 누나..
내가 너무 어린 거 같아 부끄러워요내가 하는 일에 책임지고 싶은데.
한 여인을 그리워함은 나의 자유인데..
이러한 감정에도 책임은 따라야겠지요나중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지언정.
아직 자라지 않은 소년이 새삼 누나를 사랑한다 할 때,
우선은 부끄럽고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혼란합니다.
어쨌든 누나로 인하여 편지가 써짐은 나의 기쁨이겠지요.
누나의 사랑은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는,코끝 찡한 슬픔의 결정(結晶)이겠지요.
누나의 깨끗한 가슴에 나의 얼룩진 손이 노크하는 것마저송구합니다.
누나의 맑은 웃음이 내 반듯한 일상을 뒤집어 놓았어도,
유치한 나의 정열에 누난 부디 평온하기를..
별처럼 반짝이는 감수성을 의식하고도 누난 고요한 채 외면하지만
나는 서운하지 않아요, 누나.
난 누나에게 묻지도 보채지도 않을래요.
흐르는 세월이 소박한 운명을 빚어,
아무것도 묻지 않는 나와아무 말도 하지 않는 누나가
미소로 이어질 때,
누나도 나처럼 사랑한다 말해 주세요.
부끄러워요...
93. 10. 17
지수 드림
저어..죄송하지만 안경 좀..
아, 안경..너, 안경 벗으면 장님이구나. 그래도 벗으니깐 더 귀여운데?
주세요..
급하긴..알았다 알았어. 누가 팔아먹을까 봐 그러니? 뭐, 안경이 고급스러워 보이긴 하네.
그나저나 너..안경 없이도 이 정돈데, 이것 쓰고 나면 날 아예 잡아 죽이려고 덤벼드는 거 아니야?
죄송해요. 아깐 악몽을 꾸었거든요..
여자에게서 안경을 받아 끼고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여자의 얼굴과 벌거벗은 모양새가 이내 시야에 들어왔고, 지수는 흠칫 놀라며
마치 못 볼 꼴을 갑작스럽게 목격한 사람처럼 황급히 고개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하였다.
여기가 어딘가요? 제가 왜 이곳에 있는 거죠?
너 정말 아무 것도 기억 안 나?하기야 첨부터 업혀 들어왔으니 지금은 어리둥절할 만도 하겠다.
여기가 어디긴 어디야, 선아리 베가스지.
예?! 선아리요?그렇게 먼 곳까지..
왔단다
친구들이 여기까지 널 업고 왔단다. 근데, 걔네들 친구 맞긴 한 거니?
너랑은 어째, 영 딴판으로 생겨들 먹어서 말이야.발랑 까진 게, 하는 짓들도 그렇고..
'아, 어렴풋이 기억난다. 철용이가 억지로 술을 먹였었지.으으.. 어지럽고 메스꺼워 죽겠네.'
저어..부탁이 있는데요..
그래, 이제 기운이 좀 나?할까?
'뭘 한단 얘기지?'
그게 아니고..무서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거든요. 분장하신 거 지워 주시면 안 될까요?
하하하! 뭐? 분장??
너 완전 숙맥이구나.너! 나쁜 애들 꾐에 빠져 예까지 온 것 맞지? 업혀 올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얘! 영업도 안 끝났는데 화장을 지우라고? 내 밥줄 끊으려고 작정하는 거냐, 시방??
무슨 말 하시는 건지..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어요.
모르면 말아라.나야 손해 볼 것 없지. 돈은 미리 챙겼겠다, 그 짓 안 해도 되겠다..
한 십 분 여유가 있으니 너랑 썰이나 풀어야겠다 피곤한데 쉴 겸 해서.너도 어차피 맛이 간 것 같으니, 이왕 온 김에 조금 더 쉬었다 가. 알았냐?!
여자가 그의 옆에 벌렁 드러누워 기지개를 켠다.
아함, 피곤해.
그래, 넌 무슨 요란뻑적한 악몽을 꾸었길래이 연약한 여자를 짐짝 내던지듯 동댕이친단 말이니!? 흥!
귀엽게 생긴 것이 동생 같아서 참았지,성질 같았으면 손님이고 뭐고 확 물어뜯어 버리려다 만 거야, 알아?
정말 죄송해요, 너무 무서워서 그만..
그런데, 아까 뭐 하셨던 거예요? 제 입에 무얼 집어넣지 않았나요?
왜,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았니? 하하.
실은 말이지, 반(半) 송장이 돼서 들어온 널 보고 이게 웬 떡인가 했단다.네가 서비스 타임 내내 깨어나지 않으면 공돈이 생기는 거거든.
그런데 말이지,내가 신나는 건 신나는 것이고 니 몰골은 영 말씀이 아니더라 이거야.
병아리 새끼마냥 얼굴은 노랗게 뜨고 열이 펄펄 끓는 데다, 헛소리까지 하더라니깐?
'내가 왜 그런 악몽을 꿀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네.'
제가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구 또 있니?널 이리로 데리고 온 애들, 친구 아니지? 너 괴롭히는 놈들 맞지??
............
척 보면 착이지 뭐..넌 다 죽어가는데 지들 재미 보겠다고 꾸역꾸역 여길 오는 녀석들이 친구일 리 있어?
한 가지 더 맞춰 볼까?
............
너, 그 새끼들 물주지? 물주가 아니면, 뻗은 너를 굳이 끌고 올 리 없지 않겠어?아니다. 넌 단순한 물주 그 이상이야.
돈만 빼앗아서 둘이 홀가분하게 올 수도 있는데 왜 구태여..?
널 골탕 먹이려고, 순진한 널 타락시키려고 안달이 난 녀석들 맞지?
잘나 보이는 너를 시샘하여 못 살게 구는 막돼먹은 놈들..
귀공자처럼 생긴 건 둘째 치고 옷차림부터가 그 녀석들하곤 차원이 다르더라니..
그렇다고 사내놈들이 쪼잔하게 시기 질투나 해대면 쓰나, 한심하기는..
너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야.
그렇게 샌님 티를 못 벗으니까 애들이 우습게 보고 더 괴롭히고 싶어지는 거잖아!?
야!
너, 곱게 자란 부잣집 도련님이구나 그것도 어마무시한 부자. 그렇지?
내 눈 똑바로 봐! 귀신은 속여도 난 못 속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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