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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 꿈속 꿈으로
    Letters to D.J. (지수 외전)/FRIDAY THE 13TH 2023. 3. 15. 16:35

     

     

     

     

     

     

     

     

     

     

     

     

     

    Another stories of Jisoos in parallel universes : 2. Friday the 13th (원본) (11)

     

     

     

     

     

    영화 속 슬로 모션인 양 느릿느릿 드러나고 있는 것은 자체발광하듯 번득이는 예리한 칼날이었습니다.

     

    주방에서 흔히 사용하는 부엌칼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크기나 길이가 보통의 그것에 비해 두세 배는 되어 보였습니다.

    잔뜩 머금은 선혈을 바닥에 뚝뚝 떨어뜨리며 등장한 그것은 거대한 야수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연상케 하였습니다.

     

    저렇게 큰 식칼을 쥐고 있는 주체는 보나 마나 한 덩치 하리라 예상 안 한 건 아니나

    그래도 반전이 있기를 아주 작게나마 기대했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비현실적 체구가 불쑥 튀어나와

    아저씨에게 실망 아니 절망을 선사하고 말았습니다.

    우선 신장이 삼 미터에 육박한다면 달리 설명을 덧붙이는 건 사족이겠지요.

    이백 킬로도 넘을듯한 육중한 거구를 애써 외면한 그의 시선이 얼굴로 황급히 옮겨갔으나 이건 또 웬일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네요.

    처음엔 희디흰 밀가루로 도배를 해놓은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 얼굴 전체를 덮은 하얀 가면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언급이 없어도 누님은 잘 아시죠?

    네에, 맞습니다.

    호러물 명장 존 카펜터 감독의 고전 슬래셔 무비 핼러윈에 나오는 악역 주인공 마이클 마이어스.

     

    순수악과도 같은 이 존재가 영화에서 함부로 튀어나와

    꿈주의 허가 없이 꿈속으로 난입하였습니다.

    저(혹은 제 분신)의 꿈이자 아저씨(혹은 아저씨 분신)의 꿈속에 말입니다.

     

    매우 유명한 "할로윈의 테마곡"이 왜 안 흐르나 했습니다.

     

    처음에는 밖의 아주 머언 어딘가에서 희미한 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잔잔하게 다가오더군요. 그러더니 점차 요란해지면서

    모든 교실과 복도의 스피커들을 통해 일제히 방류되듯 앞다투어 건물 내부로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삽시간에 건물 안 모든 공간을 삼켜버렸습니다.

     

    중첩 클러스터를 떠돌던 누군가의 꿈계 파편이

    주파수 동조와 무의식끼리의 공진에 의해 이리로 이끌려왔나 봅니다.

     

    그 누군가는 할로윈을 신나게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들기라도 한 걸까요.

    현실에서 영화를 감상하다 잠들면 영화의 내용이 꿈에 섞이기 마련이라서요.

    그런데 이 현실이라는 것도 상대적일 수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제가 과거에 꾼 꿈이 무의식을 맴돌다 이번에 합류하였을 수도 있고,

    초시공 차원의 (동시 병존하는) 무수한 분신들 중에서

    사십 대 유부남인 저 또는 열 살 초등학생인 제가 현재 한창 꿈을 꾸고 있는데

    그 꿈의 일부가 이탈하여 여기 편입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도 저도 아니면, 이미 고인이 된 또 다른 분신의 망령이

    꿈 쓰레기장에 갇혀 헤매다가 본인의 분신들이 펼쳐놓은 공통 무의식계에 끄달려

    아바타와도 같은 드림바디를 타고 침투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저 이외 지구상 모든 타인들의 상념 평행계 분신들 또한

    상기 원리에 따라 제 꿈계 시스템으로 유입될 수 있습니다.)

     

     

     

     

     

    누.. 누구요!?

    누군데 신성한 학교에 무단 침입하여 이런 말도 안 되는 난동을 부리는 거야??

    몸과 입이 함께 얼어 더는 후진하지 못하고 살려달란 말을 입속으로만 웅얼거린 채

    퍼질러 오줌까지 지리고 있는 경비원을 대신하여, 우리의 대담한 아저씨가

    앞뒤 잴 것 없이 일단 일갈부터 하고 봅니다.

    다가오는 식칼의 뾰족한 끝에 시선을 고정하다 최면에라도 걸려든 듯

    경비원은 바들바들 떨기만 할 뿐 돌처럼 굳어 본인의 역할을 망각한 지 오래였습니다.

     

    자신도 무섭긴 마찬가지인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저 혼자 쓸모없는 허수아비가 돼버리다니..

    그를 원망 어린 눈으로 잠시 보다가 아저씨는 얼른 거구의 괴한에게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침묵이 가져올 후폭풍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지자 어떻게든 놈의 주의를 끌기 위해 한마디 더 뱉고 싶었으나,

    좀 전의 일갈에 뱃속의 힘을 다 쏟아부었는지

    바람 새는 타이어처럼 기운이 흩어져 여간해서 모아지질 않습니다.

    그렇게 잠깐을 망설이는 동안 수위는 마이클의 가랑이 아래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가 흉기를 아래로 향하게 고쳐 쥐는 동안에도

    수위는 여전히 꼼짝 못 하고 공포에 압도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일 따름입니다.

     

     

    안돼!!

    너 이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아저씨 안 도망가고 뭐 해?!

    최후의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내듯 억지로 고함친 것이 효과를 본 걸까요.

    백색 마스크가 고개를 획 돌려 아저씨에게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최면이 풀렸는지 수위도

    그 틈을 타 엎드린 자세로 바꾼 뒤 달아날 차비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저씨는 상관 마! 내 분이 풀릴 때까지 멈추지 않을 테야.

    만일 나를 방해한다면 아저씨라고 봐주지 않겠어!

    사람의 음성일까 의심이 드는 울림이 아저씨의 심장을 직격하였습니다.

    그르렁대는 저음의 기괴한 소리가 분명 우리말을 하고 있습니다.

    괴물 같은 목소리에 배어있는 친숙한 어투가 커다란 망치처럼 아저씨의 뒤통수를 때렸고

    그래서 직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누가 말하는 것인지를.

     

    지수 도련님! 그러시면 안 돼요!

    부디 진정하고 나랑 집에 갑시다.

    앞에선 위하는 척 살살 단물만 빼먹고 뒤론 날 무시하고 경멸하는 놈들,

    가만 안 놔둘 테야!

    저는 그런 놈 아니라는 거 잘 아시죠? 절 믿고 따라 주세요.

    이제 그만하고 나랑 가요. 나랑 영화 보러 가요.

    그 뭐.. 13일의 금요일?

    그걸 굳이 볼 필요 있어? 지금 이게 더 재밌는데?

    내가 주인공이고

    이렇게 맘대로 도륙해서 피가 낭자한 처참한 장면들을 나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데?

    아무리 꿈이라도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리 함부로 날뛰면 도련님한테 하나 득 될 게 없어요.

    도련님이 갖게 될 후유증이 이만저만하지 않을 거라고요!

    뭐? 꿈?? 이게 무슨 꿈이야!?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네에? 제가 방금 꿈이라고 했어요?

    내 입에서 그런 단어가 튀어나왔다고요?

    하긴..

    이런 일이 어떻게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겠어..

    꿈일 리 없어! 그럼 너무 허망하잖아. 복수할 수 있어서 무지 기쁘고 통쾌한데..

    이게 정말 깨어날 꿈이라면 깨기 전에 한 놈이라도 더 악착같이 부숴버릴 테야!

    자아 잘 보라고!

    잠깐!!

    수위 아저씨는 도련님한테 잘못한 게 없는데 그러면 안 되죠.

    아 몰라..

    날 방해하고 내 앞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치워버리는 게 수야 이렇게!

    안 돼!!!

     

    빡! 하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떠들썩한 핼러윈 OST를 덮고도 남을 만큼 교내로 울려 퍼집니다.

     

    사백 밀리에 가까운 등산홧발로 경비원의 머리를 무참하게 밟아 짓이기는 데 이삼 초나 걸렸을까.

    비명을 지를 새도 없어 두개골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OST를 대체했던 것입니다.

    강심장인 아저씨조차 으윽 하는 신음과 함께 고개를 돌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이클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기척도 눈치를 못 챈 것 같습니다.

    한 손으로 와이셔츠 멱살 부위를 움켜잡아 아저씨를 번쩍 들어 올릴 때까지도.

     

    소스라친 그가

    거의 사 미터 공중에서 대롱거리며 숨쉬기 어려운 듯 연방 캑캑대고 있습니다.

    저런 꼴 나기 싫으면 아저씨도 얌전히 구는 게 좋을 거야.

    아니, 아저씨니까 적극적으로 날 도우라고!

    아.. 알게에.. 쓰니까 이거 좀 놓고.. 커억.. 얘기하자아.. 고...

    왜, 다리 부러지고 싶어?

     

    내가 놓고 안 놓고는 아저씨 하기에 달렸어.

    새마을 부장 어딨어? 교무실에는 안 보이던데..

    봤으면 안내해!

    봐.. 봤어.

    안내할 테니 부디 살며시 내려놔 주세요..

     

    일 미터쯤 되는 높이에서 마이클은 내던지듯이 아저씨를 거칠게 내려놓았지만

    그는 운동 신경이 발달한 덕분에 고양이처럼 균형을 잡고 어렵잖게 착지할 수 있었습니다.

     

    휴우..

    몸이 바뀌니 행동도 터프해지셨네.

     

    어린애들 부려먹던 그 인간 말이죠? 한 성질 하는 꼰대던데 왜..

    도련님한테 못된 짓이라도 했나요?

    그놈은 인간이 아니야. 영미를 잡아먹은 흉악한 괴물이라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괴물 같은 흉악범은 지금 도련님의 모습이잖아요.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그놈은 나뿐 아니라 애들 모두에게 공평한 악질이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이번에 나랑 영미한테 준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욕은 도저히 용서가 안 돼.

    방금 영미 양도 만나고 왔는데 멀쩡해요. 그리고 오늘 도련님을 만난 적 없다는데요?

    혹시 꿈꾸신 거 아닙니까?

    아니 그건 너무도 또렷한 현실 체험이었다고.

     

    어어?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야?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난 그저 본 대로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못 믿겠으면 날 따라와 보세요.

    좋아, 만약 아저씨 말에 한치의 거짓이라도 섞였으면 각오해.

    그 작자는 물론 아저씨까지 아작을 내 버릴 테니까..

    우리 되련님 말씀 참 이쁘게 하시네.

    적응은 안 되지만 그래도 이놈의 정체가 도련님이라 다행입니다.

    아니었음 나는 진작에 이 세상 목숨이 아니었겠죠?

     

     

     

    말은 이렇게 해도,

    놈이 언제든 돌변하여 자신을 으스러뜨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저씨는

    빠른 걸음으로 그와의 거리를 최대한 유지한 채 현관을 통과하였습니다.

     

     

    얼마 전까지 햇볕이 쨍하게 내리쬐던 하늘은 간데없고, 짙게 내려 깔린 거무튀튀한 구름들이

    다양한 모양의 기괴함을 자랑하며 가득 들어차 굼실거리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초록빛으로 물든 어두운 회색의 하늘 한가운데가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제법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고

    거기서 생성되는듯한 구름들이 가장자리로 밀려 나오면서 나머지 하늘을 빽빽하게 채우는 양상이었습니다.

     

    교문 쪽으로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아저씨의 시선은 홀린 것처럼 자꾸만 하늘로 향합니다.

    난생처음 목격하는 괴기스러운 장관에 시선이 고정됨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 테지만, 그 도를 넘어

    마치 하늘 위의 무언가가 주문을 거는 그리하여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드니 문제입니다.

    미쳐 돌아가는 하늘의 그로테스크한 무늬가 그의 뇌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거의 뛰다시피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정면을 주시하는 게 아니라 고개를 완전히 젖혀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네요.

     

     

    이런!

    위쪽을 집중해서 계속 보고 있다 느낀 건 저만의 착각이었습니다.

     

    초점을 잃어 흐릿해진 동공이 무척이나 졸린 사람의 그것과 흡사하다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젖힌 지 몇 초도 흐르지 않아 그의 눈꺼풀은 스르르 닫혀 버렸던 것입니다.

     

    걸으면서 잠이 들었고 그렇게 잠든 채 걷고 있습니다.

     

    바로 뒤에선

    식칼을 치켜든 사이코패스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일반인의 두 배가 넘는 보폭으로 맹렬하게 쫓아오는데, 생뚱맞게 잠이 들어 버리다니요!

     

    저 비현실적인 하늘이 과연 야로를 부린 것일까요.

     

     

     

     

     

     

     

    꿈속 꿈이다.

     

    직업 정신 투철한 네 아저씨가

    위험에 처한 너를 찾아 데려오려고 이러한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조난당한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감금된 사실을

    아저씨가 어떻게 알고..?

    무의식으로 연결된 드림바디들의 직감은 모든 것을 단번에 꿰뚫을 수 있다.

    의식의 해탈을 무의식이 모방하는 것이지.

    물론

    어느 시공에 위치한 1차 꿈주의 무의식이 꿈속 꿈을 기획하였고

    이곳의 2차 꿈주는 그것을 이행할 뿐이지만.

    저 기묘한 하늘과는 관련이 없다는 이야기죠?

    저것은 악몽 트랩의 표식들 중 하나이다.

     

    저것의 활성화는

    악몽과의 꿈 접합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저것은

    그의 예정된 꿈 시나리오가 연쇄살인마의 난입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 체계인 셈이지.

    동시에,

    무의식이 "유사 의식"화하여 목표 꿈계를 타겟팅할 수 있도록 저것은

    부유하는 상념 조각들을 집중시켜 에너지로 투사하는 렌즈 역할도 하고 있다.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충분한가?

    역시 연관되어 있었군요..

     

    "꿈이 망쳐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저 요망한 현상이

    "드림바디가 꿈꿀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한다니,

    참 아이러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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