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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손절 3지수 이야기/이상한 누나 2024. 7. 5. 12:27
억! 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을 움켜쥐는 화숙을 보자 달수는 갑자기 분노의 화신이 되어 팔꿈치로 그의 등짝을 강력하게 가격하였다.
쿵! 하는 둔탁한 음향이 도끼로 내려찍히는 고통을 홍보하는 동안, 지수는 호흡 정지의 아뜩한 진공 속을 날아다녔다.
(고꾸라져 마룻바닥과 키스하는 충격도 "진공 속 유영"을 중단하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엎어져 슬로 모션으로 바동대는 그를 -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 밟으려는 달수에게 앙칼진 목소리가 화살처럼 날아가 꽂혔다.
그러지 마!!
화숙의 옹골찬 기세에 눌려 주춤하고 물러서며 달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람 죽일 일 있어? 얘 지금, 숨도 못 쉬잖아!
이 새끼가 널 걷어찬 거라고! 넌 화도 안 나냐?
됐어. 이 자식 속마음 안 걸로 충분해.
차인 부위의 얼얼함이 가시지 않아 놀란 유방을 손으로 달래 가며, 그녀는 숨을 몰아쉬고 있는 지수 곁에 엉덩이를 붙였다.
내 사랑 방식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데, 이러고도 날 사랑한다고 지껄인 거니?
나란 년이 이렇다는 걸 눈곱만치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가증스러운 놈.. 넌 내 앞에 얼쩡거릴 자격도 없어! 형편없는 함량 미달에다 사내 구실도 못하는 녀석아, 당장 꺼져버려!!
화숙은 구겨진 바지를 집어 그의 얼굴에다 던졌다.
달수한테 얻어맞은 충격으로 정신이 몽롱해진 지수는, 그녀에 대한 연정이 각질화되어 떨어져 나가고 각별했던 감정이 참담하게 부서져 내리는, 균열의 메마른 고통과 씨름하며 바지를 천천히 입기 시작하였다. 찢겨 걸레가 되다시피 한 팬티는 도저히 입을 수 없어 맨살에 바지만 간신히 추켜올렸지만, 자신이 팬티를 안 입고 있음조차 깨닫지 못할 만큼 그는 반 이상 얼이 빠진 상태였다.마지막 회심의 일격을 옴팡지게 선사하려던 달수가 화숙의 제지에 못내 아쉬워, 수위를 대폭 조정한 한 방으로
지수의 포기를 담금질하려고,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대충 힘을 뺀 팔을 들어 올리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평소의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마음껏 지를 새도 없이 낡은 대문이 아가리를 벌컥 벌리며
건장한 체구의 사내를 순식간에 토해 내었다. 득달같이 마당을 가로지른 그가 (어디에 닿을지 목적지가 뻔한) 달수의 팔을
단번에 꺾어 제압하였다.
너 이놈의 시키, 딱 걸렸어! 감히 누구한테 손을 대려고..?!
아악!! 뭐야?! 누군데..?
대문 밖에서 이른 저녁부터 손수 삐끼질을 하던 포주가 사내를 끌다시피 데려온 것일까.
활짝 열린 문으로 육중한 몸집과 달리 재바르게 따라 들어오다가 그 광경을 보고 적잖이 놀란 듯
그녀는 포효에 가까운 고함을 냅다 질러대기 시작했다.
아이고 손님! 오자마자 이게 뭔 일이래?!
달수 이놈아!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넌 또 여기서 무슨 사고를 치고 있는겨?!
나 그 짓하러 온 거 아니니까 피 보기 싫음 아줌마는 잠자코 있어!
네가 달수냐? 너 지금까지 도련님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낱낱이 고해라! 이 자리에서 세상 하직하기 싫으면..
사내의 으름장에도 아랑곳없이 씩씩거리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인 포주를, 그녀와 함께 들어온 더 젊은 사내가
뒤에서 붙잡고 늘어지듯 필사적으로 저지하였다.
이거 안 놔?! 느그들 패거리로다가 시방 영업 방해하는 거여 뭣이여?
화숙이 이년아, 멀뚱히 서 있지만 말고 빨리 파출소에 전화 넣어 아무나 오라고 해!
허허, 이 아줌씨 보소. 이 짓거리나 하면서 근처 경찰들하고는 꽤나 친해진 모양일세?
불러볼 테면 불러 봐. 이 안에 미성년자가 있는 걸 보고도 마냥 봐주기만 할까? 그리고 내가 누군지 알면
니들이 믿는 썩은 공권력도 어쩌진 못할걸?
보아 하니 떳떳할 구석은 눈 씻고 찾아도 없는 것 같은데, 괜히 경거망동하지 말고 내게 잠깐만 협조하라고.
길게 끌지는 않을 거요..
엄마, 이 아저씨 말 들어.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아가씨가 사태 파악을 할 줄 아는군.
지수하고는 내가 제일 길게 알고 지냈으니까 나랑 얘기해요. 달수 씨는 놔주고요. 그러다 뼈 부러지겠어요!
그래요, 좀 놓고 얘기합시다. 우릴 일방적인 가해자로 몰지 말라고요!
저 자식 아니 댁의 소중한 도련님 때문에 우리 화숙이가 얼마나 거 뭣이냐 정신적으로다가.. 예?!
이 새끼가.. 너야말로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어린아이를 폭행한 현행범으로 널 반드시 깜빵에 처넣어 주겠어!
봤어요? 내가 얘 패는 걸 형님이 보셨냐고요..
부잣집 도련님 함부로 했다가 뼈도 못 추린다는 것쯤은 우리도 잘 안다구요.
저 녀석이 화숙이 보려고 너무 자주 드나들고 화숙이를 귀찮게 하는 바람에 참다 참다 내가 나서서
좋은 말로 타이르고 있던 중이었단 말입니다.
조까는 소리 하고 앉았네. 너희들 비열한 속내를 모를 줄 알아? 난 훤히 꿰뚫고 있다고.
순진한 애 꼬셔서 본격적으로 뜯어낼 작당을 하고 있었잖아!? 이것들이..
아저씨, 그건 오해예요. 그런 거 절대 아니라고요!
나 비록 남자 X 빨면서 먹고사는 년이지만 그렇다고, 어린애한테 푼돈이나 갈취하는 공갈범 취급은 하지 마세요!
우리가 가방끈은 짧아도 그 정도로 무식하진 않습니다.
저 녀석은 부자고 나발이고를 떠나 여기 와서는 안 될 골치 아픈 훼방꾼이란 말이요!
보세요! 뭘 어찌해 보기도 전에 대단하신 나리들이 귀신처럼 나타나서, 까딱하다간 여기가
통째 골로 가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오히려 약자고 피해자라고요..
이것들이 쌍으로 입을 맞췄나.. 뻔뻔한 것들이 뚫린 입이라고 말하는 꼬라지들 보소.
대단하신 부잣집의 그렇게 잘난 도련님을 그럼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하신 거죠?
미리미리 단속을 하셨어야지, 다 곪아 터진 뒤에야 이리 들이닥쳐서 불쌍한 우리만 죄인으로 닦아세우면 끝인가요?
그래 불쌍해서 말로 해결 보려고 이렇듯 참고 있는 거 안 보여?
파렴치한 주둥이들 한 번만 더 놀려 봐! 이곳 사창가를 불도저로 싹 다 밀어 버릴 테니까!
왜.. 못 그럴 것 같아? 도련님 집안한텐 그까짓 건 씹던 껌 뱉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라고!
패닉에 준하는 절망감이 아이러니하게도, 날카로운 비수들을 수없이 장착하고 죄어 오는 비참한 이 현실마저
아스라한 몽환인 양 잔잔하게 만들어 주었다. 지수의 주변에서 비켜 흘러 나가도록.
지독한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아드레날린처럼..
아저씨가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혼란하고 당황스러울 만도 한데, 믿었던 사랑이 매몰차게 던진 배신감과
낭패감이 그 딴엔 너무 거대하여 다른 어떠한 갑작스러움도 (그냥 모두 받아들일 만한) 하찮고 귀찮은 것들로 여겨질
뿐이었다. 이 순간에는..
사태를 관망하는 것조차 힘에 겨워 지수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거의 기어들어가는 소리에 가까스로 기력을 보강하였다.
아저씨.. 이제 됐어. 그만해..
내가 잘못했어.. 다 내 탓이야, 그러니 그만 해..
그의 한 마디에 사내의 노발대발하던 기세가 급격하게 꺾이는 모습을 본 화숙은, 자신이 그간 봐온 폭력배들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터프한 존재가 이곳을 잔인한 폭력의 아수라장으로 변모시킬 가능성은 당장 없음을 간파하고, 벗어 둔 스웨터를 목에 걸친 채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충실히 연기를 했음에도 감독으로부터 핀잔만 듣다가 (체구나 공격성에 있어 자신의 두 배는 돼 보이는) 엉뚱한 괴한에게
박살이 날 뻔한 달수 또한 이때다 싶어, 어린애나 위협하는 짓거리가 짜증 나고 싫증난 척 괜히 투덜대면서
열린 대문 밖으로 부리나케 달아나 버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가누고 김기사의 부축에 의지해 마당으로 내려서는 지수의 어깨를,흥분이 가라앉은 예의 그 허스키한 목소리가 다시 붙잡았다.
야! 잠깐 거기 서!
귀한 도련님의 한마디면 저 건장한 침입자들이 꼼짝도 못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화숙이겁대가리를 상실한 의기양양함을 과시하며 되바라진 "최후의 일격"을 마지막으로 선물하려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니 확신에, 그는 돌아보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고
출입구 쪽을 향하여 무거운 발을 계속해서 떼어 놓았다.
나지수! 이대로 그냥 갈 거니?
한결 부드러워진 그녀의 목소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유로워지려 몸부림치는 만신창이 절망을 잔인하게 유혹하였다.
"최후의 일격"이 정해진 수순의 마지막임을 잠시 망각한 조급함은, 혹시나 하는 착각과 간절함으로날아오르는 절망의 발목을 잡아 끌어내렸다.
'누나의 얼굴을 한 번만 더 보자.
가슴에 깊이 새겨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을 만큼만 바라보자.'
천천히 돌아서는 바로 그때, 가을의 명징한 밤하늘에서 때아닌 함박눈이 쏟아져 내렸다.
아니지, 그러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더욱 충격적인 "기적"에 눌려 그러한 일상적(?) 기상 이변은 얼굴을 내밀 수 없었다.
그 어떠한 이상 기후도, 철없는 절망을 비웃으며 처절하게 펄럭이는 "지금의 비참 송이"들보다 기적적이지는 않으리라.
오늘을 대비해서 마지막 카운터펀치용으로 준비한 소품이 (무언가 담겨 있는 마분지 박스가)힘차게 뻗은 화숙의 가녀린 팔뚝을 추진 엔진 삼아 - 바가지를 휘둘러 물을 끼얹듯 - 머금고 있던 내용물을
허공에 발사하였고, 그것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불꽃처럼 공중에서 조각조각 분리되어
지수의 멍청한 슬픔 위로 뿌려졌다.
나, 이딴 거 필요 없으니까 주인한테 돌려주는 거야. 알았냐?
볼썽사납게 찢긴 흰색 종이 조각들이 큼직한 눈송이가 되어 마당에 어지러이 착륙한 것이다.
그가 바친 깨알 같은 글씨들이 잔인하게 절단되어 땅 위에 널브러지고 있었으니 이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린스무 통의 편지들이 (위험한 환상이 흐르는) 잔잔한 순수 위에 뼛가루로 뿌리어지고 있는 참담함이었다.
젖이 빨고 싶으면 존나게 빨다가 조용히 갈 일이지, 어디서 허튼수작이야?!
내가 니 애인이냐? 니가 뭔데 이따위 편지질이냐고!
이런 거 받으면, 무식한 년이 입 헤벌리고 좋아할 줄 알았어?
뭔 헛소릴 지껄이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 이딴 거 백날 보내 봤자 시간 낭비라는 것도 몰랐니?
도대체 넌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어린놈이 재수 없게 잘난 척이야? 잘난 척은..!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이 밥 먹고 할 짓 없어서 장난치는 걸로밖에 난 못 느끼겠다!
이 아저씨들보다 훨씬 더 무서운 너네 집 어르신들한테까지 들켜서 괜히 나 곤란하게 만들지 말고좋게 이야기할 때 공부나 열심히 하셔! 나나 달수 오빠 같은 사람 되기 싫으면 다신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란 말이야!!
그래, 넌 우리랑은 근본이 다르니까 우리처럼 되진 않겠지.
하지만 내 경고하겠는데, 너 이대로 엇나가다간 틀림없이 왕싸이코가 될 거다.
사이코들에 비하면 우린 아무것도 아니란다. 정말 못 말리는 골칫덩이에다 쳤다 하면 대형 사고..그야말로 지구에서 사라져야 할 병균 같은 인간말짜 사이코, 몰라?
넌, 그런 사이코 중에서도 울트라 캡 사이코가 될 소질이 철철 넘친다, 야!
그러니 나중에 여러 명 다치게 하지 말고 이 누나 말 명심해!혼자 똑똑한 체 나대지 말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서 엄마 말 잘 듣고 착하게 살아라! 알겠냐?!
씨발 무식하고 더러운 년이 얻다 대고..?
감히 우리 도련님을 이런 식으로 능멸해?! 안 되겠다. 넌 좀 혼나자. 일루 와!
아저씨! 제발 쫌..
그녀가 다칠까 봐 아저씨를 제지하는 행위는 (그녀에 대한 애착이 아름답게 수놓인) 본인의 과거로부터무의식적 관성이 애틋하게 이어진 결과일 뿐이었고 이와는 별개로, 지수는
소중한 마음을 갈가리 찢어 내동댕이친 화숙의 냉혹하고 몰인정한 행동 앞에서
현실의 예리한 통한을 뚫고 돋아나는 가시 같은 분노를 생경하게 느껴야 했다.
꿈길을 거니는 듯한 삶을 살아왔기에 그를 심심찮게 괴롭혀 온 울분 역시도 흐릿한 비현실을 입고 있었던 그로선생전 처음 가져 보는 생생한 느낌이었다.
새벽녘까지 뿌연 물안개로 덮여 있던 호수에 영롱한 아침햇살이 내려와 불투명한 수면을 깨끗하게 닦아 놓는 느낌.맑은 유리구슬 같은 느낌이랄까..
구름 한 점 안 보이는 막막한 하늘에서 알록달록 화려한 빛을 발하는 U.F.O.가 쨍하고 나타나 버린 신비한 체험.이것이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투하한 메가톤급 날벼락"의 자욱한 검은 연기로 인해 촉발된 셈이다.
'누난, 나를 죽이는 순간까지 나를 살아있게 하는군요.
난생처음 느껴 보는 이 강렬한 분노. 핵섬광 같은 이 살기(殺氣).
누나에게 마지막 선물로 바치고 싶을 만큼 찬란합니다.
이것은 내게, 약동하는 평화입니다. 나의 존재를 거부하고 짓밟을 때마다 누나의 선명한 불안이 떨어뜨리는..
이러니 내가 누날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누날 죽이고 싶을 만큼요..'
찢겨 뒹구는 "마음의 조각"들을 밟으며, 지수는 화숙이 간절히 바라는 대로 움직여 주었다.그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선의인 듯이..
"이제는 오롯이 그림자로 남아 그녀를 공포에 떨게 할 뿐인 부질없는 나지수"를
"그녀가 찢은 편지"보다 더 잘게 꼼꼼히 찢어발겨 주고, 지수는
그의 체류를 완전히 막아 버린 "창녀 화숙의 세계"로부터 쫓겨나듯 빠져나왔다.
꽤 번잡해진 사창가의 (짙은 어둠에 도드라진) 붉고 푸른 쇼윈도 조명 아래, 침침한 퇴폐성이 착색된 창백한 얼굴 셋의(망연자실을 억지로 숨긴) 어색한 표정들이, 조잡한 크로마키 배경 같은 노골적 환락을 뒤에 두고 둥둥 떠다녔다.
걷는다기보단, 겉도는 자전거 바퀴처럼 공연히 헛심 쓰듯 흐느적거리며 크로마키를 탈출하려 애쓴다는 표현이 더 옳겠다.
"엉뚱하고 맹랑하기가 짝이 없는 이 요주의 인물을 앞으로 어찌할꼬.."라는 갑갑함을 잔뜩 머금고 내려다보는 마 군 옆에서,후련한 절망이 번진 두꺼운 안경알이 무거운 돌덩이라도 되는 양 힘겹게 추켜올리며 지수는
곧 주저앉을 것처럼 터벅터벅 걸었다. 아직도 초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작고 앳된 중학생 소년이
지저분한 욕망의 하수구를 통과하며 "어른이 될 수 없는 진한 아쉬움"을 배설하느라 다리가 후들거리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묵묵히 응시하던 그가 별다른 얘기 없이 지수 앞에 넓은 등을 보이며 쪼그려 앉는 자세를 취하였다.
둘 사이에 자주 있어 왔던 행위여서일까. 말없이 그에게 업히는 지수의 모습 또한 자연스러웠다.
허허.. 도련님, 많이 힘들죠? 더는 묻지 않을게요.그나저나 오늘 일은 우리 셋 모두 무덤에 드갈 때까지 비밀인 겁니다?
알겠냐? 김 군아?!
그럼요, 당연하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착잡함을 넘어 거의 똥 씹은 얼굴상으로 그의 뒤를 바짝 쫓던 김기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까딱 잘못하여 집안 어른들이 알게 되었다가는 빼도 박도 못하고 감당하기 힘든 풍파를 맞닥뜨리게 될 난감한 상황이
두 고용인 청년의 (생활과 결부된) 다분히 이기적인 우려 속에서 현실화를 향해 바야흐로 무르익어가는데도,
(비록 이들에 비할 바는 아니나) 본인의 생활 역시 한동안은 만만치 않은 구속의 고통을 감내해야 할
"불안의 시간"이 덮칠지 모르는데도, 이미 얼이 빠질 대로 빠져 있는 지수에겐 그것이 그다지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크게 보면 밋밋한 일상의 그럭저럭 견딜만한 난관"이란 식의 평상시 그답지 않은
쓸데없는 대범함과 자기 객관화를 불러일으킬 따름이었다. 이는, 위험을 감지하는
기민하고 영악한 생존 본능의 발로라기보단 "만사 귀찮음"이 유발하는 무책임한 방관이자 자기 포기에 불과하였다.
그만큼, 엄청난 실존적 충격의 여파가 튼튼한 막처럼 그를 감싸
발각 따위의 세속적 충격 나부랭이쯤은 너끈히 튕겨내고 있는 것이리라.
아저씨들, 잘 와 주었어요..
나중에야 어찌 되든 우선은 긴급한 임무를 뒤탈 없이 완수하여 한편으론 다행스러우면서도절반은 홀가분하고 절반은 찝찝한 어정쩡한 기분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 마 군이었다. 따라서
무사히 지수를 찾아 "김기사가 차를 세워 둔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줄곧 의기양양할 수만은 없었다.
'별일이야 있겠어?집에 가는 동안 차 안에서 도련님하고 말이나 좀 맞춰 놓자. 그럼 되지 뭐..'
도련님,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도련님 편입니다. 아시죠?험한 세상이 도련님의 여린 가슴에 상처를 주더라도 너무 아파하거나 슬퍼하지는 마세요.
도련님 곁엔 언제나 이 아저씨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믿고 편히 쉬세요. 괜히 어려운 길 가지 마시고요.. 네?
응, 알겠어. 그런데 말이야..
지수의 가느다란 흐느낌이 - 자신의 멘트에 혹여 감동한 것인가 김칫국을 한사발 들이켜고 있는 - 마 군의
튼실한 어깨를 타고 넘어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나의 평화가 나를 버렸어..
내 그리운 피지섬이 끝내 침몰하고 말았어. 바닷속 깊이깊이 가라앉고 말았어..
화숙이 누나,
내가 시도하는 사랑이 한낱 백일몽에 지나지 않았을까요?
똑똑한 어른들이 아이의 진지한 현실을 참 잘도 부수뜨린다는 건 새삼 말 안 해도 잘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누나마저 꼭 이렇게 그들 편에 서야 했나요?
그들의 천진스러운 환상이 결국은 세상을 지배하기에,
누나도 살기 위하여 우리의 진지한 현실을 박정하게 버렸나요?
내가 똑똑하고 단순한 어른이 되면 그때 나를 다시 만나줄 건가요? 그렇다면지금껏 나를 쉽게 만나 주고 편하게 부담 없이 내 귀에 속삭여준 건 누나가 아니었나요?
서로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행복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나요?
실은, 내가 가져온 돈하고 더 친했었다고요? 정녕 그런 거였다고요?그랬더라도 상관없다 했잖아요..
실망할 줄 모르고 달려드는 나에게 질려 버렸나요?
부뚜막에 올라가는 얌전한 고양이가 점점 부담스러워졌나요?
내가 만들던 사랑의 방식에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 우리 누나,
어리석은 내가 그린 사랑의 설계도를 똑똑한 누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워도
그리하여 나의 사랑이 이 땅 위에 지어지기 힘들어도, 난 누나를 만난 것만으로 기쁠게요.
누나가 선사한 난폭한 이별을 마지막 선물로 알고 감사히 웃을게요.
이제, 아이의 생동하는 현실은 거친 타올로 박박 벗겨내고날아갈 듯 가뿐한 말끔이가 되어 너무 쉽게 그들로 변할까요? 누나가 원하는 게 바로 이런 건가요?
비틀린 아이의 허물에 환멸을 뱉는 세련된 환상이 되면,
기쁨을 울리고 행복을 우울케 하는 노련한 어른이 되면 누난 다시 나를 만나줄 건가요?
서글픈 노력은 가상해도, 누난 내 굳센 변모 역시 받아주지 않을 테죠.
누나의 덜 여문 환상은 반드시 부작용을 일으키고 뒤늦게 어린애처럼 울먹일 테니까요.
"내가 버린 초라한 사랑"을 찾고 싶어서, 그것이 그리워서 말이에요. (누난 왠지 그럴 것 같아요..)
내 가엾은 사랑이 "박제된 현실"과 함께 지금은 단단한 땅 속으로 묻히지만
누나가 진정한(?) 어른이 되는 데 실패하고 자유로워지면, 그때는 꼭나의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주세요.
그때까지는누나 원하는 대로, 어설프지만 어른이 되도록 애써 볼게요. 이를 악 물고 그리운 누나를 잊어 볼게요.
그러면 되는 거죠?이젠 좀 안심이 되나요? 부디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럼 안녕히.....
1993. 11. 19
잃어버린 나의 사랑에게
지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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