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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마지막이 기다리는 곳
    지수 이야기/이상한 누나 2023. 10. 27. 14:36

     

     

     

     

     

     

     

     

     

     

     

     

     

     

     

     

     

    애기야, 나 왔다.

     

     

     

    어머, 교수 오빠 왔네? 요즘 왜 이리 뜸했어? 그래도 명색이 이년 비공식 기둥서방인데 너무한 거 아니야 오빠?

     

     

     

    그렇게 됐어 인마. 근데 너도 말 진짜 안 듣는다. 내가 오빠 앞에 교수는 빼라 했어 안 했어?

    널 안 지 한 일 년 다 돼가는데 그 소린 씨부랄 아직까지 적응이 안 되네..

    너 자꾸 그딴 식으로 부르면 나 발 끊을 거야!?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면 그게 교수지 뭐야? 이 화숙이 아무리 무식한 년이지만 그 정도도 모를까 봐?

     

     

     

    간판만 대학이라 걸어 놓은 다 쓰러져 가는 학교에서 시간 강사 짓 하며 겨우 입에 풀칠하는데 교수는 얼어 죽을..

     

     

     

    하여간 이 유식한 오빠는 너무 겸손해 탈이야. 것도 적당해야지 나 같은 무식쟁이 기죽이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뭐야?! 허허, 이년이 보자 보자 하니까..

    안 본 새 많이 씩씩해졌다? 내 앞에서 기어오를 줄도 알고. 그간 뭔 일 있었다냐?

     

     

     

    빨리도 물어보시네.

    말도 마세요, 개똥철학 오빠. 요즘 골칫덩이 애송이 녀석 하나 때문에 오빠의 수제자 화숙이 속이 말이 아니야.

     

     

     

    그동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귀한 얘기들을 공짜로 해 줬더니만 뭣이 어째? 개똥철학??

     

     

     

    이제 이걸 어쩌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답답했는데 그래서 가장 먼저 오빠가 생각났는데

    때맞춰 이렇게 나타나 주다니 무지 반갑다. 추운데 거기 서 있지만 말고 얼른 방으로 들어와 오빠.

    나 고민 상담해 줄 거지?

     

     

     

    너답지 않게 꽤나 살갑게 군다 싶더니.. 결국 그런 거였어?

    알겠는데 그렇다고 초장부터 보채지는 마라.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되지. 확실히 해 둬! 난 너랑 하려고 온 거니까.

     

     

     

    그야 물론이죠. 내가 많이 좋아하는 서방님인데 뜨겁게 안아드리고 용돈도 두둑이 드려야죠. 어서 오시와요 호호..

     

     

     

     

     

     

     

     

     

     

     

     

    돈도 돈이지만, 커지는 위험 부담을 무릅쓰면서 단속의 눈을 피해 미성년자를 불러들이는 일은

    계속할 짓이 못 되는 건 맞아. 단속도 단속이지만 그 애가 또 어마어마한 부잣집 아들이라며?

    그런 애들 잘못 건드렸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골로 가는 수가 있어. 차라리 경찰이 양반이라고.

     

     

     

    그런 것도 당연히 무섭지만 무엇보다

    순진한 어린애 마음을 훔쳐 내 잇속만 챙기는 야비한 짓거리를 평생 할 순 없는 노릇이라서요..

     

     

     

    화끈하고 뒤끝 없는 네 성격상 구질구질한 사기꾼 짓을 어설프게 이어갈 생각이야 물론 없겠지.

    이쯤 해서 걔를 놓아주는 게 맞다.

     

    후후, 약은 년.. 자기가 큰일 날 것 같으니까 슬슬 발 빼려는 것 보소.

    너의 타고난 위기의식이 위험한 게임에 제동을 걸 적절한 시점을 알려 주고 있구나. 음, 잘하고 있어.

     

     


    게다가, 내게 한없이 집착하는 그의 찰거머리 행태가 점점 귀찮아지기도 했고요.

     

     

     

    싫증 났다는 게 바로 위기의식의 무의식적 발동이라니까! 너의 그 눈치 빠른 계산속에나 고마워하라고.

    그나저나 그 자식 장래 스토커로서의 자질이 농후하구만..

     

     

     

    스톡.. 뭐라고요?

     

     

     

    알아서 좋을 말은 아니니 그냥 넘어가.

     

     

     

    또 무시한다. 교수면 다야?

     

     

     

    너야말로 또 발끈한다. 허 참, 이 귀엽기만 한 "다혈질의 자격지심"을 어이할꼬..

     

    녀석을 이용할 가치가 상실된 건 아니지만 만일의 사태와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아쉬워도 이쯤에서

    깜찍한 연극을 마감해라. 그것만이, 화숙이 네가 그간 본의 아니게 떠맡은 악역의 굴레에서 벗어나

    가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니까.

     

     

     

    이 화숙이가 그 정도 생각도 안 했겠어? 일단 결심이 서면 나름 짱구를 굴려가면서 방법을 고안한다고요, 동철 씨.

     

     

     

    까분다. 교수 호칭 빼랬더니 바로 동철 씨?

     

     


    아잉,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우리 한창 심각한 이야기 나누고 있는 판에..

     

     

     

    안 봐도 훤하네. 당당하기로 소문 난 네가 어울리지도 않는 자기비하성 발언 좆나게 하면서,

    지금은 더러운 사창굴로 기어 들어와 창녀 젖이나 빨고 뒹굴 때가 아님을 그 꼬맹이한테 열심히 강조했겠지.

    현재의 상황이 멜로드라마가 아님을 재차 환기하고 그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도록 좆나 유도했겠지. 안 그래?

     

     

     

    말해 뭐 해. 부모, 학교, 친구, 미래 등등 떠오르는 단어들을 되는대로 들먹이면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애 좀 썼지.

    달래어도 보고 한편으론 윽박도 질러가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줄기차게 강변했지만 결국 아무 소용 없었어, 지금까진..

     

     


    무식한 창녀의 서투른 설교가, 난생처음 여자한테 빠져 똥오줌 못 가리는 사춘기 춘정 발동 소년에게 통할 리 만무하지.

     

     


    자꾸 무식한 창녀 어쩌고 할래?! 자꾸 그러면 듣는 창녀 속상해!

     

     

     

    이참에 확실히 끊어 내지 않고 꾸물대면 자칫, 부잣집 변태 아들의 못 말리는 파상공격에 장기간 시달리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어.

     

     

     

    변태는 무슨..

    너무 순진해서 탈인 녀석인데..

     

     

     

    정신적인 변태가 더 무섭고 지독한 법이란다, 이 헛똑똑이 여편네야!

     

     

     

    여편네? 나 드디어 자기 마누라로 인정받은 거야? 아잉 좋아라..

     

     

     

    하여간.. 여기 못 말리는 애 하나 추가요!


    철이 들면야 스스로 어리석었음을 깨닫겠지만 걔 증상으로 보아, 알아서 물러나길 기다리다간

    성미 마른 네가 제 명에 못 살 수도 있겄다. 어쩌면 영원히 철이 안 들 부류가 그런 애들인지도..

     

    야, 표정이 왜 그래? 내 얘기가 그렇게 충격적이야?

    왜..

    이제야 슬슬 무서워지냐? 여유만만이더니 이제 좀 초조해지기 시작해?

     

     

     

    정말 그리되면 어쩐다지?


    걔가 좀 이상한 면이 있긴 했어. 지겹도록 자주 만나면서 새삼스럽게, 끊임없는 편지 공세는 왜 하는 건지..

     

     

     

    편지를 줄줄이 보내온다고? 음.. 진짜로 엉뚱한 놈이긴 하네. 어렸을 적 나를 보는 느낌도 들고 말이야 클클..

     

     

     

    자기가 그랬다고?

     

     

     

    어려서부터 뭐든 읽는 걸 좋아하고 끄적이는 걸 좋아하다 보니, 보잘것없어도 이렇듯 펜대 굴리는 일을 하는 것 아니겠어?

     

     

     

    어린애가 글은 또 제법 잘 쓰더라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으면 무조건 잘 쓰는 것 맞죠 선생님?

     

     

     

    글쎄..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 나이에 내용을 모호하게 시적으로 꾸밀 수 있다는 건 보통 이상은 된다는 뜻 아닐까.

    일단 직접 읽어 봐야 판단할 수 있겠으니 편지들이나 쭉 꺼내 놓아 봐. 고추도 여물지 않은 중학생 놈의 연애편지라..

    고것 참 재미나겠는걸.

     

     

     

     

     

     

     

    단순하기 짝이 없는 네가 이해하기엔 힘든 구석이 없지 않군. 그러나..

    짜식, 자기가 뭘 쓰고 있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저 어른들의 글을 그럴듯하게 흉내 내느라 정신이 없구먼.


    아직 어린 탓에 다듬어지지 않았고 "뭣도 모르면서 젠체하는" 유치함이 흠씬 묻어나 있긴 하나, 그걸 감안한다 해도

    또래로 한정했을 때 꽤 많이 써 본 솜씨는 맞아. 자의식을 이렇게나마 표현할 줄 아는 애들은

    사실, 관련 전공자가 아닌 이상 대학생들 중에도 드물거든.

     

    남부러울 일 없는 부유한 집안 자식이 글재주까지 타고났다면 솔직히 부러운걸?

    평생 가난과 싸워야 할지도 모를 나로선, 집안의 적극적인 뒷받침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할 녀석의 미래가 샘나.

    단, 요 소심하고 바보 같은 녀석에게 심겨 있는 맹랑하고 엉뚱한 "사고(事故) 치기" 유전자가

    끝끝내 발현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사춘기 시절 불장난 같은 환상에 중독되어 곧잘 비이성적 행동들을 하고는 하는데, 이 녀석의 경우

    대가리는 "복잡하고 추상적인" 관념에 경도되어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돌아가면서

    행동이 너무 뭐랄까, 직선적이고 단세포적이랄까 거침없고 빠꾸가 없는 퇴행적 행동이라 이 말이지.

    한마디로, 이놈만의 독특한 뇌 구조에서 나온 이성적(?) 논리는 오히려 상식에서 벗어난 행위를 강요한다 이거야.

    알겠냐? 네가 생각해도 이상하지?

     

     

     

     

    알 것도 같고.. 뭐 그리 알쏭달쏭해? 아무튼 교수 아니랄까 봐..

     

    이게 또 웃긴 게, 나 찾아올 때 직접 주면 될 걸 구태여 우편으로 일일이 부친다니까?

    편지라고 보내오는 것들도 참..

    대충 훑어만 봐도 내 심정이 이해될 거야. 내용을 세세하게는 몰라도 사랑 어쩌고저쩌고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고 있으니

    그래서 연애편지겠지만..

     

     

     

    이거 좀 위험한데? 그것은 아마 일종의 의식(儀式) 같은 걸 거야.

    의도적이라기보단 "너에게 투영된 이상향"을 향한 갈구가 무의식적으로 패턴화되어서 그렇게 표출되는 모양이다.

     

     

     

    미친..

    오빠 얘기 잘은 접수가 안 돼도 왠지 오싹한 느낌은 오네. 감으로 느껴져. 아, 소름 끼쳐!

     

     

     

    지적이고 감각적인 (아니 그러려고 애쓰는) 글솜씨와는 상반되게, 화숙이 네 옆에만 누우면 퇴행의 극치를 구현하려는 듯

    갓난아기 행세를 고집하는 그의 심리 상태로 짐작하건대, 녀석이 씨불이는 사랑 타령은 진짜 사랑일 리가 없다.

    그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야.


    연하의 어린 소년이라는 점은 논외로 두고라도, 설사 너희 둘 사이에 - 진실에 가까운 - 사랑이 싹튼다 한들

    자신의 분수를 너무 잘 알아 탈인 네가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미련한 짓은 결코 안 할 거잖아, 그렇지?

     

     

     

    당연하지. 나 이래 봬도 현실 직시의 달인이라고요!

     

     

     

    그래, 그건 나도 인정.

     

    잔인한 현실의 이빨에 물려 피투성이 될 짓은 꿈도 꾸지 않는 차원에서 넌

    사랑의 싹을 처음부터 베어 버리는 냉정함의 칼을 갈 것이 분명한데, 하물며

    사랑 근처에도 못 가는 병적인 집착에 네가 휘둘리지는 않을 거잖냐?

     

     

     

    두 말 하면 잔소리죠! 그런 진상들 내가 한두 번 겪어 보나..

     

     

     

    이년아, 정신 안 차려? 너 이미 걔한테 반은 홀렸잖아?! 네 눈만 봐도 난 다 안다고. 어휴 이걸 그냥..

     

     

     

    뭔 소리야?? 내가 뭘..? 여태껏 심심해서 데리고 논 거라 했잖아요!?

    빠구리 없이도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고 얼마나 좋아? 그동안 꿀 빨긴 했지 쩝..

     

     

     

    그 거짓말 참말이야? 믿어도 되겠어?

    이거 이거.. 아무래도 수상한데..? 편지들 모아 둔 것도 그렇고..

    야! 그 자식 나보다 잘생겼냐? 외모가 네 스타일이라도 돼?

     

     

     

    어머, 오빠 질투하는 거야? 아이, 좋아라. 더 질투해 줘, 더 더..

     

     

     

    이년도 사춘기 뗀 지가 얼마 안 돼 나서 그저 잘생기기만 하면 장땡이라니까.

    불안해!

    거기다가 다른 사내놈들과 달리 창녀 귀찮게 안 해, 공돈 줘, 입 안의 혀처럼 굴면서 여자들한테 은근 싫지만은 않은

    애정 공세, 사랑 고백 노골적으로 해 줘, 더군다나 귀엽고 예쁘기까지 한 연하라..

     

    (삼십 대인 나 정도가 젊은 축에 드는) 늙수그레한 인간들만 만날 상대하던 년이 저런 귀물(貴物)을 건졌으니

    반하지 않는 게 이상한 거 아냐?

     

     

     

    이 오빠, 정말 날 모르는 거야? 아님 모른 척을 하는 거야?

    오빠야말로 정신 차렷해! 나 화숙이야!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어 온 화숙이라고!

    날 너무 사랑하니까 질투에 눈이 멀어 잠시 멍청해진 게로군.

     

    쟤 빛 좋은 개살구라는 거 여기서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래, 그렇게 나와 줘야지. 역시 내 수제자답군.

    내가 귀에 피 나도록 주의를 줬으니 본인이 깨닫고 잘 처신할 테지. 이 재수 없는 편지부터 다 버려!

     

    그놈 얘기는 이쯤 하고, 한 번 더 사랑을 나눠 볼까?

    그런 다음 시간 남으면 네가 원하는 개똥철학이나 강의하던가..

     

     

     

    나야 땡큐죠. 오빠 덕에 고 녀석한테 말발에도 안 밀리고 그럭저럭 대화를 이어가곤 했어요.

    모르긴 몰라도 고놈, 이 누나 창녀치고 쫌 유식하네 했을 걸요?

     

     

     

    어허, 또..!

    그 자식 얘기에 눈 초롱초롱해지는 것 보소. 이거 안 되겠네? 조심하란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내 곁으로 와.

    그놈 생각 안 나도록 이번 기회에 아주 죽여주겠어, 흐흐..

     

     

     

     

     


    지수 본인은 진지한 감정이라 믿고 싶겠지만 그래서 더욱 집착의 고삐를 늦추지 않겠지만

    이로 인해 파생되는 내적 외적 피해는 (극심한 스트레스 및 그의 불장난이 발각되었을 시 예상되는 가족들의 공격 등은)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 되어 버리고 마는, 우습지도 않은 상황 속으로 화숙은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이것이

    웬만해선 무서울 게 없던 괄괄한 그녀조차 기죽게 하였고, 그녀의 미래를 완전히 장악할지 모를

    (확률적으로 우세한) 공포가 되어 가랑비에 옷 젖듯 시나브로 그녀를 떨게 만들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은 위기감이 - 그간 가졌던 진한 호감을 비롯하여 - 지수에 관한 오만정을 다 떨어뜨렸고,

    19세 소녀의 다소 경망스럽지만 철저한 자기 보호 본능으로부터 우러나온 변덕은

    사랑스럽던 소년에서 무서운(?) 찰거머리로 급전직하한 그를 떼어내고 심지어 눌러서 터뜨려 버릴

    비장의 카드를 기어이 꺼내고야 말았다. 그녀의 은밀한 기둥서방이자 멘토인 윤동철의 냉철한 지시에 따라..


     

     

     

     

     

     

     

     

     

     

     

     


    기온이 뚝 떨어진 늦가을의 쌀쌀한 저녁.
    찬 바람이 드세게 불어 체감 온도는 영하로 내려가 있었다.

     


    이날도 지수의 선아리행은 어김없이 이루어졌으나, 여느 때와는 다른 불안감이

    택시를 잡기 위해 서 있는 그의 등 뒤에서 소리 없이 스멀거렸다.


    본게임에 선행하는 오픈 게임처럼, 곧 있을 날벼락의 전초전인 양

    "어머니의 계책"이 비밀리에 대저택을 빠져나와 지수의 뒤를 밟고 있는 것이다.

     

     


    비밀 지령(?)을 싣고 로열패밀리의 막내 도련님을 미행하던 검은 표범은 (잘 빠진 고급 외제 승용차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어린 주인님을 태우고 유유히 멀어져 가는 비루먹은 당나귀가 (법인택시가) 가소로워

    잠시 미행을 멈추고 그것의 꽁무니를 노려본다.

     

     

     

     


    가로수의 앙상한 가지들과는 대조적으로, 도로 위에는 마른 낙엽들이 노르망디 해변에 널린 연합군 시신들처럼

    깔려 있다가 가끔씩 바람을 따라 무리 지어 흩날리고는 하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침침한 가로등 조명 아래 처절한 군무를 선보이며 펄럭펄럭 떨어져 내리는

    희미한 핏빛 얼룩의 잎사귀들.

     


    화숙이 누나를 보러 가는 즐거운 외출인데도, 그것들을 바라보는 지수의 눈이 잔뜩 우수를 머금고 있다.
    즐거움이 베푸는 여유로 인해, 본디 센티멘털리스트인 그가

    여린 감성의 소유자들에겐 보편적이라 할 감미로운 감상에라도 한 번 젖어 보는 것일까.

     

     


    좋은 시절을 아쉽게 마감하고 황량한 겨울의 침투를 대책 없이 기다려야 하는 불안과 서글픔이

    가을의 가로수로 하여금 메마른 눈물을 뚝뚝 흘리게 한다.


    지수에게 닥칠 "미래로부터 뛰어오는 앙상한 추억들의 마중"을 예민한 무의식은 외면하고 눈을 감아 보지만,

    질주하는 바퀴에 치여 거친 숨결로 바스락(!)하고 외마디 웃음을 터뜨리는 낙엽들의 냉소가

    시간 앞에 무기력한 그의 가슴을 아프게 후비면서 암시와 전조의 역할을 얄밉게 이행하고 있었다.

     

     

     

     

     

     

     

     

     

     

     

     

     

     


    택시가 선아리 시장 입구에서 멈추자 김기사는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가 선아리에 산다? 이렇게 멀리서 학교를 다니는 친구가 있다고?
    게다가 여긴 시장 근처잖아? 알다가도 모르겠군. 어째 조짐이 심상치 않은데..'

     

     

     


    부근에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잠시 머뭇거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지수를 놓칠 뻔하였다.


    오십여 미터까지 벌려진 그와의 간격을 좁히려고 김기사가 허둥지둥 걸음을 재촉하는 동안, 지수는

    작고 마른 몸의 이점을 살려, 붐비는 초저녁 시장통을 신속히 벗어났다.

     

     


    군대 가던 그 전날 친구들과 함께 만취 상태로 딱 한 번 찾아든 적 있는 김기사에게

    선아리의 환락가가 전혀 생소한 곳은 아니었지만, 육 년 전 경험은 아련한 기억 이상의 뚜렷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지수를 놓치게 되면 꽤나 헤매야 할 처지에 봉착할 것은 명백한 일. 
    사모님의 엄명을 받든 그로선 쌀쌀한 밤공기와 관계없이 진땀을 쏟아야 했다.

     


    구불거리며 지수를 은폐하려고 기를 쓴 컴컴한 골목들의 공(功)에 힘입어, 몽유병 환자처럼 날쌘 어린 스토커는

    선아리베가스의 "여자 시장"에 무사히 안착했고, 모퉁이로 사라진 그의 자취를 쫓아 육상 스타 칼 루이스처럼 뛰어온

    김기사는 가쁜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당돌한 도련님의 행각을 포착하려고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거의 한 발짝 차이로 - 매음굴에 스며드는 -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데 실패하고 만 그는

    순간 낭패감 때문에 몸을 떨어야 했으나 이내 침착성을 되찾고 "원색의 거리"를 가로질렀다.

     

     

     


    '그래,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지.
    이리로 들어온 시간 차를 따져 봐도 반대편으로 빠져나갔을 가능성은 희박해.
    분명, 이들 중 어느 한 곳으로 들어갔을 거야.'

     

     

     


    양복 입은 댄디한 젊은이가 시야에 들어오자 갑자기 나타난 아줌마 삐끼들의 호객 행위는 열띤 경쟁 체제로 돌입하여

    그의 팔에 필사적으로들 매달렸고, 유리문을 두들겨대며 "오빠! 오빠!"를 연호하는 매춘녀들의 소란한 유혹 (열성적인

    상행위) 또한, 잠자고 있던 그의 정욕을 눈치 없이 들쑤셨다.

     

     

     


    '젠장, 이럴 줄 알았지.
    지수 이 녀석만 아니면 눈요기도 실컷 하고 떡 본 김에 제사도 지낼 텐데, 나에겐 막중한 임무가 있으니..

    저 섹시한 암컷들이 몽땅 그림의 떡이구만, 쩝..


    그나저나 이 자식 보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집에다간 거짓말하고 창녀촌엘 드나들어?!

    그럼 여태 한 달 가까이 여길 드나들었단 말인가.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한창 자랄 뼈 다 삭고 말겠군. 이거 보통 큰일이 아닌데..


    사모님한텐 뭐라고 말해야 하나. 이 사실을 알면 온 집안이 또 한 바탕 들썩할 게 뻔한데..
    까딱 잘못되면 불똥이 지수 전용 기사인 나한테까지 떨어질지도..


    우라질! 있는 놈 자식은 신나서 이러고 있는데, 빽 없고 힘없어 나처럼 빌붙어 사는 놈은

    모가지 잘릴 걱정부터 해야 하니..

    세상 참 더러워서.. 퉤!!'

     

     

     


    생각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자, 잠깐 깨어나 졸린 눈으로 여색을 염탐하던 욕정은

    단번에 독한 수면제를 삼켜 버리고 말았다.


    지저분하고 짜증 나는 손길들을 거칠게 뿌리치고 욕설까지 주절거려 가며 "지친 관능의 거리"를 통과한 그는

    4차선 차도와 마주한 맞은편 입구에 버티고 서서 지수의 모습이 다시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정말 못할 짓이군. 오래 걸리지야 않겠지.

    요 녀석을 잡은 다음 어떻게 할까..


    그래, 우선은 꼭 잡아야 돼! 잡아서 남자 대 남자로 설득해 봐야지.
    으르든 달래든 해서 다시는 이런 못된 짓 안 하겠다는 확답을 받아낸 다음 오늘 일은 없던 걸로 눈감아 줘야지.

    물론 그 전에 나하고 말을 맞춰서 알리바이를 확실히 해두는 건 기본이고..


    사모님 앞에서 쫄지 않고 보고하려면 빈틈없이 입을 맞춰야만 해!

     


    이런 니미.. 별것도 아닌 일로 스트레스를 받는군.

     

    아니 별것이긴 하지. 정신 바짝 차리고 살펴야 한다. 설마, 비상 통로가 있어서 옆으로 새는 건 아니겠지?
    혹시 날 먼저 발견한 건 아닐까. 하여간 여기서 놓치면 끝장이야!


    망할 녀석, 앞으로 한 번만 더 이딴 데 오기만 해! 다리를 콱 분질러 놓을 테니..

     


    내일부터 당분간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해야겠군.


    사실 그동안 내가 좀 방심하고 해이했었어.
    수업 마칠 때쯤 정문 앞에 내가 얼쩡거리는 걸 보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키는 녀석이라

    등교만 신경 쓰고 하굣길은 대충 사모님 눈치 봐가며 제낄 때가 더 많았지.
    덕분에 나야 편했지만, 이제 보니 이따위 꿍꿍이속 때문에 날 따돌린 거였구만.
    바로 이런 것들이 꼬투리감이야. 얼마든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직무유기가 된다고! 으이그, 살 떨려..

     

    이번 사태가 수습되고 잠잠해질 때까지는 지수 요 골칫덩이를 어떻게든 꽁꽁 묶어 둬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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