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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이자 에필로그 (사적인 편지)Letters to D.J. (지수 외전)/프롤로그이면서 에필로그 (사적인 편지) 2022. 10. 9. 11:24
A Letter to D.J. : Another stories of Jisoos in parallel universes
BYJ 님, 밤늦게 수고 많으시지요?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가련한 영혼들을 위하여 감미로운 음악과 감동 어린 영화 이야기들 많이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추억 아닌) 추억의 저장고를 뒤적여 이렇듯 생생한 빛바램들을 끄집어 낸 저의 용기를 채택해 주셔서 또한 감사해요.
*** 제 파란만장한 스토리들은 누님의 방송 포맷에 적합하지 않고 누님 방송에서 소개될만한 성격의 사연들이 전혀 아니기에, 저는 사실 누님께 개인적인 편지를 보낸다 상상하며 글을 쓰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이란 건 생각보다 센 놈이더군요. 존경하는 누님이 실제로 읽어 봐 주신다면 얼마나 기쁠까! 이런 턱도 없는 욕망이 한 번 꿈틀거리기 시작하자 쉽사리 가라앉는 건 고사하고 점점 강렬해지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픈 유혹이 성큼 다가오는 걸 저는 느껴야 했습니다.
제 의식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으나, 무의식이 점화하는 사악한 충동은 - 알아서 묵묵히 진행하는 - 성실한 조력자로 하여금 자꾸 무리수를 두도록 부추기는 것이었습니다. 순진한 척, 못 이기는 척하는 침묵과 노코멘트가 결사반대의 강도를 현저히 떨어뜨리며, 그의 단계적으로 상승하는 추진력에 날개를 달아주고 말았습니다.
저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조력자는, 더는 아무 힘없는 제 반대를 찬성의 시그널로 맘껏 속단하고 아마도 누님 회사의 높으신 분들과 일종의 밀약을 맺은 모양입니다. 보나 마나 상상초월의 반대급부 보장이 전제되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말도 안 되는 억지성 편집 사연이 방송을 타고야 마는 기적이 이뤄진 것이겠지요. 말은 안 하셔도 누님 심기가 편하지는 않으셨으리라 아니 대단히 불편하셨으리라 확신합니다.
제가 원한 게 이런 건 아니었는데 욕심이 과하니 결국 사달이 나게 되어 있었나 봅니다. 원래의 스토리를 산으로 날려버린 편집본으로도 저의 정체는 숨겨지지 않아 나라 전체가 들썩였고 성난 청취자들의 파도처럼 밀려오는 비난과 항의가 방송국과 누님의 입장을 아주 난처하게 만들어 버렸죠.
누님 죄송합니다. 이것은 저의 반성문이기도 합니다. 제 사연이 전파에 실린 날 이후 지금 이 시각까지도 저는 깊은 후회와 자책에 빠져 있습니다. 우유부단과 어리석은 욕심이 만나 저지른 이 한심한 사태가 너무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이에요. 지극히 바보 같았던 불찰에 대해 감히 용서를 구할 자격도 제게는 없는 것 같습니다.
거듭 죄송합니다. 죄송하단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죄인이 뻔뻔하게도 또다시 편지를 보내게 되어 죄송합니다.
누님께 드리는 마지막 편지이오나 행여 불쾌하시다면 거부하셔도 됩니다.
원본을 얼마만큼 보셨는지 아예 못 읽으셨는지 저로선 알 수 없습니다만, 스토리들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을 대략 파악하고는 계시리라 가정하고, 누님이 제 이야기 전부를 개괄하여 총평하실 수 있도록, 일인 세미나를 개최하는 심정으로 그리고 기작성된 과제를 다시금 복기하는 심정으로 저의 체험을 되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진작에 저의 체험담이 허무맹랑하다 여기셨겠지만 그래도, 제가 소개한 제 인생의 감명 깊은 영화들은 각기 나의 다른 우주들에서 또 다른 나들이 추억하였던 것들임을 재차 강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망상에 가까운 상상의 나래를 편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을 확률이 더 높겠으나, 혹시 영화적 상상에 소질 있는 녀석쯤으로 치부하고 그냥저냥 귀엽게 봐주셨을지도.. 이런 맹랑한 추측을 하며 미소짓는 것 또한 저만의 자유겠지요.
하지만 제 근원이자 모두의 근원인 대 근원의 광대무변한 영혼을 걸고 맹세컨대 제가 적어놓은 다양한 나들의 다양한 인생 스토리에는 결코 한 치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았습니다.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지인들도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각각의 우주에서는 엄연한 실존 인생들입니다. 다만 저는 그들을 "분신"이라 부릅니다. 그렇다고 우리 우주에서 멀쩡히 살아 숨 쉰다는 이유 하나로 이곳의 나와 이곳의 그들이 본체의 특권을 누린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여기 존재하는 우리들도 무엇인가의 분신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무엇이 지고지순한 초월적 존재였으면 좋겠는 것은 종교적 열망에 기인한 우리의 순전한 바람일 뿐 그 반대일 수도 상상 이상일 수도 혹은 아무것도 아닌 걸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다른 우주의 에피소드가 펼쳐놓는 이야기는 시나리오가 아니라 그 역시 지독한 현실입니다.
우주의 경계면이 가로막아도 분신의 데자뷔는 또 다른 분신의 추억을 꿈인 양 감지해낸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내가 실제 겪은 과거사인지 아니면 자주 꾸어 익숙해진 그래서 기억과 융합한 모조 현실인지 가끔 헷갈리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자잘한 해프닝들의 배경이 우리의 현실과 흡사하므로 단단히 착각하는 경우가 생기겠지만 엄존하는 디테일의 차이가 신빙성을 박탈하는 바람에 결국은 모호한 현실을 부정하고 맙니다.
제 사연을 사전 검토하셨다면 캐치하셨을 텐데요. 제가 나열한 추억 속의 영화들 모두 영화를 즐기는 분들이라면 대부분 아실 만한 것들이지만 동시에, 줄거리의 디테일에 있어 우리가 익히 아는 영화와는 조금씩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정정하겠습니다. 완전히 다른 줄거리, 다른 이야기이며, 가장 큰 차이는 영화가 아니고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소개한 스토리들은, 인류가 만들어 낸 꽤 유명한 영화들이 어떻게 집단무의식을 점령하고 아울러 개개인의 상념 작용에 의해 무수히 변조되는가 나아가 어떻게 작은 차이에서부터 완전한 탈바꿈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증식하여 현실로서 무한한 우주들의 한 자리씩을 차지하는가에 대한 예시들일 뿐이며, 기존 작품들의 예술적 가치나 영화사적 위치를 폄하할 의도는 절대로 포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얼빠진 놈의 장난 섞인 조크쯤으로 가벼이 생각하거나 기억의 착각에 의한 고의성 없는 실수로 봐 준다면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그러나 그렇게 봐 주기엔 대체적인 얼개나 플롯 이외의 모든 것이 달라도 너무 다른 그리하여 도저히 동일한 영화로 인정할 수가 없는 저의 사연들이겠습니다. 사실로 위장된 거짓이라 지탄하고 비난을 퍼붓는다 해도 할 말이 없는 그래서 그것을 감수해야 함이 제 당연한 몫입니다만 그럼에도, 현실과 중첩된 가상이야말로 다른 세상의 역사이며 - 미래와 포개어진 현재, 판타지를 흡수한 과거, 비현실이 코팅된 논픽션이 끝없이 변주되며 도열하는 - 정돈된 카오스의 초우주적 현현임을 결코 부인하진 않을 겁니다.
제게는 명확히 보이는 평행한 현실들이지만 담당자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 "추억의 오류"라는 표현이 무색해지는 - 대폭 수정해야 할 난제들이었을 테지요. 따라서 확인과 수정, 삭제라는 지난하고 수고스런 과정 끝에 청취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정상적(?) 사연으로 기어이 탈바꿈하여 전파를 타게 되었군요.
결과적으로 제 입장에선 거짓이 방송된 셈이지만 만일 이에 실망한다면 이는 지독한 이기심의 발로라고 밖에 설명이 안 될 겁니다. 결격 사유 충분한 보잘것없는 내용을 탈락 시키지 않고 고쳐서라도 끝내 소개해 주신 귀사의 따뜻한 배려에 그저 한없는 감사를 드려도 모자랄 판에 말이지요. 더구나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BYJ 디제이님이 포근한 음성으로 읽어주시는데 그로 인한 기쁨과 행복만으로도 감읍할 따름입니다.
예전 같으면 누군가의 조력이 행사된 결과라 의심할 만도 할 법한 정황이나 지금은 감히 그런 꼼수를 쓸 때가 아님을 저뿐 아니라 절 도와주는 분도 깊이 인지하고 있는 만큼 이 느꺼운 감격을 순수한 기적이 베푼 호의로만 맘껏 받아들일 수 있어 기쁘고 안심이 됩니다.
<------ 이 부분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저의 가증스러움을 실감할 수 있는 문장이어서 삭제하지 않고 초안 그대로 살려 보았습니다.
이심전심 제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조력자와 배후에서 그를 지원하는 막강한 세력 덕분에 일사천리로 그리 된 걸 일찌기 감지하였으면서 잘도 외면하고 모르는 척, 혼자 깨끗한 척.
참으로 징글징글하네요. 정말이지 저 자신 몹시 혐오스럽고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요량이었던가. 어리석기가 한량없네. 다른 이도 아니고 누님한테 저따위 멘트를 날릴 생각을 하였으니.
본인의 프로그램이 졸지에 음험한 모사의 악취 나는 구덩이로 빠져버렸는데, 그래서 피해자라 할 수 있는 누님이 이 사태의 전말을 빤히 지켜보고 있는데, 그런 분 앞에서 파렴치한 가증의 수사를 구가하려 하였으니..
고개 숙여 백 번을 사과해도 모자랄 노릇입니다.
절망적이던 저를 여태껏 꾸준히 도와주고 있는 고마운 분(이라고 밖에 밝힐 수 없는 점 양해 바랍니다) 덕택이지만 어쨌든 제 이야기가 디제이 누님께 안착하는 것도 꿈만 같은데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기까지 하니 떨리는 영광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 아닐는지요.
비록 편지에 쓰인 연락처는 현재 저의 거처가 아닐지라도, 심야 라디오 방송을 듣는 소박한 자유마저 쉽게 허락하지 않는 곳에 제가 있을지라도, 이곳의 고단한 상황들이 저를 둘러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중일지라도, 누님께 저를 표현하고픈 간절한 열망이 결국엔 이렇듯 작은 아니 너무도 큰 기적을 이뤄냈나 봅니다.
스스로를 꽁꽁 감출 수밖에 없는 이 얄궂은 운명이 한없이 야속하지만 그리고 위험천만한 어리석음의 자업자득이 치명적이게 답답하지만, 한편으론 저의 태산 같은 죄에 비해 이 철면피한 절망감은 차라리 아늑한 것 같아 오히려 겁이 날 지경입니다.
지금의 알량한 고통과는 비교불가한 단죄가 저 우주 너머 어딘가에 도사리고 나를 표적으로 나만의 맞춤 재앙을 끔찍한 방식으로 빚어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말입니다.
그럼에도 BYJ 누님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저의 이름과 저의 이야기를 속삭여주는 그 순간만큼은 잠시, 존재함의 두려움을 잊고 시한부일지 모를 행복감에 온전히 젖어볼 수 있어 좋았어요.
(다른 건 다 감춰도 이름만은 정말 감추기 싫었어요. 성은 말고, 지극히 평범해서 누구도 눈치 못 챌 이 이름. 다중 의식의 폭풍 속에서 그리운 인물의 이름마저 달라지는 와중에 신기하게도 변함이 없던 저의 본명 지수.)
<------- 이 아둔하고 무지몽매한 종자여, 이러고도 발각되지 않기를 바랐던가. 군중의 예리한 레이다를 교란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가!
아, 혼란스럽습니다. 실은 발각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이 역시 의식과 반대로 가려 하는 청개구리 무의식의 고약한 심보일까요.
제대로 된 벌을 받지 않아 저에게 분노한 그분이 하늘에서 내려와 저의 혼을 한올 한올 찢으면서 제가 받을 많은 벌들을 직접 설계라도 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제1장 능욕과 조리돌림 당하기 편이 실현되고 있는 걸까요.
너무 약한데..
살아생전 워낙 착하셨던 분이라 시작이 미약한가 봅니다. 차라리 그분을 도와 함께 짜고 싶습니다 저의 파멸 계획을요! 끝이 절망과 공포와 비참으로 창대해질 때까지..
미지의 초시공에서 온 미지의 존재들이 멀티 유니버스를 관통하는 "나"의 추억들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일관되지 않고 비논리적이라 합리적인 통합은 불가능한, 저만의 영화 한 편. 그러나 각각이 단편이요 - 독립된 하나하나의 - 인생인 씬들은 그 자체로 빛나는 아름다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이한 영화의 아름다운 씬들을 마지막 한숨처럼 토해낼 수 있어 저는 뿌듯했습니다.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인지도..) 스스로 대견함이 느껴지는 자존감을 만끽함에 있어, 화룡점정이 되어주신 라디오 관계자분들과 친애하는 BYJ 누님의 프로그램에 거듭 감사를 표하며, 아쉬움의 구질구질한 노크를 이제는 멈출까 합니다.
<---------- 그동안 너무도 죄송했습니다. 저 때문에 고생하신 관계자 여러분들께 깊이 사죄 드립니다.
저 같은 재수 없는 놈은 부디 잊어 주세요.
여러분의 무수한 분신들이 아무리 무수한 세계들을 펼쳐 영겁과 무한을 차지하고 있을지라도 여러분은 아직 하나의 세상에 갇힌 불완전한 존재일 뿐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해탈하기 전까진 여러분에게 적용되는 삶과 죽음의 섭리는 복잡하나 단호하고, 유연하나 추상같습니다. 바라건대 죄짓지 마세요. 크던 작던 가급적 죄란 것을 저지르지 마세요. 죄인지 아니지를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아니기에, 헷갈리신다면 누가 봐도 명확한 죄들부터 우선 짓지 마세요. 흐트러진 기에서 죄가 되는 말과 행동이 나오니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사시기 바랍니다.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아직은 "하나인 인생"에 갇히신 여러분, 적어도 저 같은 큰 죄인은 되지 말아 주세요. 저를 보고 본인들 스스로를 단속해 주세요.
제발 저 같은 인생은 되지 않기를..!!
안녕히 계셔요.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