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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 위기 속으로
    월광 프로젝트 (판타지) 2023. 6. 7. 20:16

     

     

     

     

     

     

     

     

     

     

     

     

     

     

    레이저 빔을 연상케 하는 정체불명의 광선이,

    해골 인간의 뒤통수를 때림과 동시에 그대로 관통하여 미영의 양미간을 적중시켰다.



    십 분의 일 초간 시간은 정지하였고, 괴물 남근의 요도 입구에선 검은 기운이 오징어가 내뿜는 먹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미영의 이마 위 50센티 공중에 뜬 채

    그녀의 정수리를 빠져나오는 (상대적으로 작은) 검은 연기 뭉치 같은 것과 합쳐졌다.

    그렇게 형성된 거무스름한 미니 먹장구름은 새까만 공처럼 축소 응집되면서,

    고압력의 고통에 시달리는 듯 이그러졌다 펴졌다 몸살을 앓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고무공의 질긴 거죽과 유사하게 피막화 하였고,

    그 속에 갇혀 버린 무언가가 이리저리 날뛰며 발악하는 양상이었다.

     

     

    이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실치 않은 (사람인지 짐승인지도 분간하기 힘든) 단말마의 비명이,

    곧 폭발이라도 할 것처럼 약동하는 검은 구체를 갈가리 찢을 기세로

    날카롭게 터져 나왔다.

    지옥의 절망을 과시하는 무시무시한 괴성이 신호가 되어 검은 덩어리는 산산조각 나 버렸고,

    사방으로 흩어진 수만 개 아니 그 이상의 파편 - 같은 것 - 들이 불똥 튀기듯 바닥에 떨어져 거머리처럼 꼬물거렸다.

     

    그것들은 바닥 위를 새까맣게 뒤덮고 기어 다니는가 싶더니,

    낱낱의 거머리 - 비슷한 것 - 들이 더욱 잘게 분열하여 점점이 박히듯 흙 속으로 스며들고 말았다.

     

     




    10분지 1초의 정지가 끝나자, 임무를 완수한 신비스러운 구름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스타트랙"의 "엔터프라이즈"호가 순간이동 한 것처럼,

    있던 자리에서 감쪽같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찰나의 의식 상실을 극복하고, 마취 상태로부터 회복되는 환자같이

    노곤한 흐릿함을 걷어내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미영이 곁에 나란히 누워 있는 상준의 모습이 보인다.
    하반신 나체인 채로 창피한 줄도 모르고 뻗어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꼴불견이다.


    밤이라고는 하나 또 어두운 구석 자리라고는 하나 행여 지나는 사람들한테 들킬까 조바심이 나서

    (그가 그를 내려다보는) 기상천외한 상황을 의식할 경황도 없이 몸을 일으키려 애쓴다. 아니,

    그의 속으로 그가 얼른 들어가 힘주어 눈을 뜨고 상반신을 일으켰다는 표현이 더 옳겠다.

     



    '이상하다.

    왜 나는 밤이슬 맞아가며 바깥에서 한가로이 잠을 자고 있었던 걸까.
    이 근처에서 미영이랑 캔맥주 마시며 수작 좀 부린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어라?!

    내 거시기하고 사타구니가 온통 정액 투성이네??

    꿈을 꾼 기억도 없고..

    언제 몽정을 했지?'

     




    팽개쳐 둔 팬티를 집어들어 대충 분비물을 닦아낸 다음 바지를 찾아 입었다.


    옆에 누워있던 미영이 그제야 잠에서 깼는지, 속 편하게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한다.

     

     



    오빠, 우리 여기서 잔 거야?

     



    그런가 본데?

    고작 캔맥주 하나씩 마시고 둘 다 이렇게 필름이 끊어졌던 모양이다. 웃기지도 않지?

     



    어머나!!

    오빠 나한테 무슨 짓 한 거야!?

     

     



    자신이 거의 알몸임을 깨닫고 경악하는 그녀다.

     

     



    글쎄..

    찐하게 한판 하긴 한 모양인데 기억이 통 안 나!

    뭐 이런 개같은 경우가 다 있지?

     



    모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어쩐지..

    자꾸 술 먹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너! 맥주에 약 탔지?!

     

     



    그녀는 상준의 뺨을 세게 때리며 울먹거린다. 미영이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이게 웬 날벼락이람.

    쳇, 지가 무슨 요조숙녀라도 되는 것처럼 구네..'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이 난리야!? 나도 모르는 일이라니깐.

    어찌 된 영문인지 답답한 건 나도 마찬가지란 말이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구선 치사하게 발뺌하기야?

    책임져!! 오빠가 다 책임지라고! (하이고 얘가 점점..)
    나 임신하면 어떡해!?

     



    야! 진정하고 일단 옷부터 입어라.

     

    그리고 나 맹세컨대 너한테 흠 잡힐 짓 안 했어!
    기억이 잘 안 날 뿐이지, 적어도 강제로 그러진 않았다고!

    내가 몽유병환자니? 자면서 겁탈하게..

     



    몰라, 몰라! 책임져!! 잉잉..

     



    참 내.. 여기까지 따라올 땐 언제고 내숭은..

     

    미영아 안 어울려! 아다도 아닌 것이..
    순진녀 놀이 그만 하고 언능 가자 야!

    이런 데서 더 개겼다간 너나 나나 진짜로 뭔 일 당할지 모르겠다.

     



    별 좆같은 소리 다 듣겠네.. 아아, 존나 짜증 나!!! (그래, 비로소 미영이다운 말투로군.)


    지금 몇 시나 됐어, 오빠?

     



    이크, 벌써 11시 반이네.

    빨랑 일어나. 오빠가 집까지 바래다줄게.

     



    아앙, 난 이제 아빠한테 맞아 죽었다.

    택시 타도 12시 전에 들어가긴 다 글렀잖아! 에이 씨발..

     




    '뭐 이런 년이 다 있나 그래?


    나도 미쳤지. 저런 버릇없는 싸가지를 꼬시겠다고 시간 낭비에다 돈 낭비..
    으이그, 뭐에 홀려도 단단히 홀린 게 틀림없어.

    내가 다시 채팅을 하면, 니 아들이다!!'

     

     

     

     

     

     

     



    이건 또 무슨, 드라큘라가 양치질하는 소리인가.
    저 당시의 전상준이 벙개를 안 하겠단 결심을 해?

    나 전상준이 저 때 저런 기특한 생각을 다 했다고?

    서쪽에서 해가 떠도 여러 개 뜨겠군..

     

    그 결심 지켜졌으면, 내가 지금

    이러고 외계인한테 잡혀 뺑뺑이 돌고 있진 않겠지.

    한심한..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한참 동안 머리가 지근거려 쉽게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부분적인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듯 기분이 무겁고 언짢았다.

     



    '그 앨 어떻게 해보려고 엄청 껄떡댄 것 같긴 한데 말이지..


    맥주 몇 모금에 걔나 나나 정신을 잃었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는군.

    둘 다 코를 골면서, 훌러덩 벗어부치고 허벌나게 성행위라도 했단 얘긴가.


    정말이지 귀신한테 홀린 걸까?

     

    아후, 속 타. 기억이 안 나도 어쩜 이리 안 날 수가..'

     

     

     




    그날 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증명하는 현상 한 가지가 있다.



    그날 미영과 헤어지고 한 달가량은, 신기하리만치 성 도착 증세와 섹스 중독 증세가 말끔히 해소되었다.

    지극히 평범한 정상인으로서 상준은 무려 한 달을 버티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시한부 약효이긴 하나 "미지의 무언가"가 선사한 처방 덕분에, 감격스럽게도 그는

    막연하나마 죄책감이란 것에 시달리며 그렇게 한 달간을 기꺼이

    우울해하고 슬퍼하였다.

     

    범법에 준하는 일탈의 외줄을 아슬아슬하게 타며

    악마의 희롱으로 그가 이제껏 농락한

    가엾은 희생물이자 먹잇감들에게,

    일말의 양심이 뻔뻔하게 속죄를 시도하던 시기.

     

    악어의 눈물이 눈치 안 보고 마음껏 분출되던

    알량한 카타르시스의 시기였다.

     

    검은 기운에 대한 복종을 일시적으로 거부하고,

    사특한 빛을 발하는 오염된 월광을 향해

    일방적으로 휴전을 고하는,

    바람직한 당돌함의 시기였다.

     

    아플 만큼 센치하여 달콤했던 30여 일은

    그토록 치열한 휴지기였다.

     

    물론, 재차 엄습할 폭풍 (색정의 광풍) 전야의

    위태로운 고요함에 불과하였지만...


     

     

     

     

     

     

     

     

     

     

     

     

     

     



    일 분여는 족히 걸리는 듯한 초(超) 공간 이동 중에

    상준은 자꾸만 정신이 혼미해져 감을 느껴야 했다.


    존재감이 무력해지는 "의식의 해체"가 이런 것일까.



    "눈을 뜨면 엄청난 부작용과 함께 암흑의 변방으로 튕겨져 나갈지 모른다"는 공포만이

    유일한 의식으로 남아 분명 눈꺼풀을 단단히 접착하고 있었는데도,

    울긋불긋한 "빛 화살"이 무수히 날아와 그에게 박히는 듯한 환영을

    덮인 눈꺼풀을 뚫고 상준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다행히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방에서 날아드는 예리한 광선들이 전신을 관통하는 모습은

    단순한 환영으로 치부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해져 있었다.

     


    기절 직전의 흐릿한 의식이 선명한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건지 아니면

    너무나 명징한 광경이 의식을 박탈하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는 맹렬하게 달려드는 또 한 번의 무섭고 황당한 체험과 마주쳐

    어찌할 겨를도 없이 백기를 흔들어야 했다.

    빗줄기처럼 박혀 드는 다채로운 빔들의 무차별 폭격으로

    몸이 점차 유동성 있는 점액형의 반투명체가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인위적으로 육신의 3차원적 파장을 들뜨게 하여 고진동의 4차원체로 변환시키는 (이른바 투명인간이 되는) 과정은

    평행우주 여행자의 신변 안전 차원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수순이라고, 친구가 일러준 적은 있지만

    이번 경험은 왠지 그게 아닌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반투명의 꿈틀대는 육체로부터 - 산산이 흩어지는 의식의 파편인 양 - "무수한 그"가 뿜어져 나와

    무수히 쏟아지는 광선 하나하나에 녹아드는, 장관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오, 제발 이게 꿈이기를..



    더 놀라운 것은, 무수히 많은 "상준 혹은 상준의 의식" 각각이,

    찬란한 베일과 같은 빛줄기들과 자신들이 합체되어 있음을

    비록 희미하나마 저마다의 자아를 통해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몸뚱이가 완전히 분산되어 사라지는 장면은 아득한 추락의 끄트머리에서 하늘거렸고,

    인간의 세포 수만큼 분열한 그를 실은 광선들은 경쟁하듯 자신들의 속도를 경신하며

    경계가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빨려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한 방식으로,

    부지불식간에 상준은 의식의 은밀한 해체를 강요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친구는, 웜홀 내의 "격자 소용돌이"에 대응하는 조작의 일환으로

    광자 원기둥의 에너지 막에 규칙적인 초(超) 양자적 충격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문득 정신이 돌아온 그는, 이제까지의 평행계 간 이동과는 사뭇 다른

    (실재와 환상의 경계에서 겪은) 상상을 초월한 무시무시한 체험에 대해 약간의 서운함을 가졌고

    친구에게 따져 보리라 벼르고 있었지만, 그럴 짬도 없이

    수 초 간격으로 서너 차례 정수리 부분에 미미한 전류가 흘러 들어와

    내장을 순환하는 듯한 찌릿함을 느껴야 했다.


    이 역시 기분 나쁜 경험이었지만, 그전에 당한 "끔찍한 파멸"의 악몽 같은 순간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 그냥 가볍게 넘기고 말았다. 더 큰 충격에 면역이 되어서였을까..


    특수한 웜홀을 통과할 때 흔히 겪을 수 있는 변수 때문이리라 애써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변변찮은 나를 위해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을 친구인데 뒤늦게 이의를 제기한들 무엇하랴.


    예민해진 심리의 미묘한 변화까지도 원격 체크하여 정신 감응으로 살뜰히 보살펴 주던 그가

    내 불편한 심기를 파악 못 했을 리 없는데 이렇듯 묵묵부답인 걸 보면,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

     

    별일 아닐 거야.

    그건 그렇고, 눈은 언제 떠야 하나..'

     

     




    친구여, 뭐라 얘기 좀 해주세요.

    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려워 말고 눈을 떠라.

    너의 더 오래된 과거로 들어왔으니..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눈을 떠 주위를 살펴보니

    꿈속에서 본 듯한 낯익은 동네의 한길에 그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인 마을인 양, 초록이 우거진 야트막한 산자락을 가까운 배경으로

    거친 시멘트 비탈길 양 옆에 드문드문 구식 양옥들이 공터를 옆구리에 끼고서 도열해 있었다.


    정말이지 야릇하고 가슴 벅찬 느낌이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잊고 살던 고향에 다시 온 기분이랄까.. 아니 진짜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에프엠의 검은 음모에 오염되어 있는 지난날의 시점이

    이렇게나 어린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와 있단 말인가.

     

    새삼 감회에 젖으면서도 착잡한 상념 또한 가눌 수 없어, 상준은

    다리를 움직여 한 걸음 내딛기조차 망설여질 만큼의 조심스러운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내가 네다섯 살 때 살던 동네로구나!
    그땐 넓게만 보이던 (집 앞의) 큰 길이 이렇게 협소하였던가..'

     




    그는, 벗겨진 녹색 페인트의 붉은 녹과 함께 아련한 추억이 듬성듬성 묻어 있는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이 집의 붉은 담 벽을 타고 위쪽으로는, 초라하게 보이는 조그만 창구가

    "담. 배."라는 투박한 두 글자 팻말을 입에 물고, 지친 한숨을 토하며 힘겹게 박혀 있었다.
    그리고 이 집의 아래쪽엔

    거칠게 찍어낸 블록을 쌓아 만든 담이 칸막이로 서 있었고, 그 옆에

    비슷한 모양의 철제 대문이 반쯤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저 집엔, 허물없이 어울려 놀던 소꿉친구 정민이가 살았었는데..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 골목 저 골목을 쏘다니며, 네 집 내 집을 오가며 정말 재미나게 놀았었지.'

     

     

     

     




    친구여, 내가 정녕 어린 시절로 거슬러 왔단 말입니까?

     

     

     




    삼륜차 몇 대를 제외하곤 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황량한 비탈길 위엔,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잘 익은 얼굴을 줄기차게 들이밀 뿐 사람의 모습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달아오른 정적만이

    저 아래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구멍가게의 빈약한 좌판대까지 굴러가고 있었다.

     

     



    '왜 대답이 없는 걸까?

    친절한 설명으로 내 호기심을 채워 주던 친구는 어디로 숨어 버린 거지?


    그나저나 지금은 한여름인 모양이군. 너무 더운데..


    잠깐!

    내가 이렇게 더위를 - 있는 그대로 - 느끼는 것이 정상적인 상황인 걸까?'

     

     




    낡은 겨울용 외투를 벗어 손에 들고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본 후, 상준은 살금살금 계단을 올라 대문을 만져 보았다.

    햇볕을 받아 온도가 높아진 철판의 뜨거운 감촉이 손바닥에 남김없이 전해져 왔다.



    이때였다.

    맞은편 이층 집의 육중한 대문이 열리고 이국적으로 생긴 부인이 나왔다.


    검은색 얇은 원피스 위에 가벼운 망사 숄을 걸치고 사뿐사뿐 계단을 내려오던 부인이,

    맞은편 집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그를 발견하고 잠시 의심에 찬 시선을 보내왔다.

     

     



    '수상도 하겠지.
    겨울 옷차림을 한 낯선 남자가 남의 집을 (실은 어린 내가 사는 집이지만..) 기웃거리고 있으니..'

     




    상준은 얼른 계단을 내려와 아무 일도 아닌 척 길을 내려갔다.


    삼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서글서글하게 생긴 부인은

    핸드백에서 선글라스를 꺼내어 끼고, 차고 앞에 세워져 있는 검정 외제차 옆에 대기하고 있던

    고용 운전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뒷좌석에 올랐다.


    미끄러지듯 그를 스치는 세단을 바라보며 상준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앞집이 잘 살았었고 난 이유도 없이 저 아줌마를 무서워했었지.

    한 번은 무슨 일 때문인진 몰라도 저 집에 잠깐 들어갈 기회가 있었어.
    당시엔 갖추기 힘든 컬러 TV와 비디오까지 있었던 것 같아.

    무척 신기했었지. 아, 그리고 또 저 집은..

    낯선 사람만 보면 굵직한 소리로 무섭게 짖어대던, 몸집이 무척 큰 사냥개 한 마리를 길렀을 거야.
    다리가 길고 귀가 축 처진, 팥죽색 점들로 온몸을 도배한 점박이 포인터였지, 아마..
    저 집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하던 그날도

    내가 대문 안에 들어서자마자, 굵은 쇠사슬에 묶인 개가 맹렬히 튀어나오며 미친 듯이 짖어댔지.


    난 넋이 나갈 듯 두려움에 빠져 울음을 터뜨렸고 급기야 오줌까지 지리고 말았어.

    그날 이후로

    아줌마의 차가운 표정과 포인터의 무서운 얼굴이 겹치면서

    저 육중한 이층 저택 자체를 괴물처럼 여기게 되었지.'

     

     




    그는 유년 시절의 호기심이 다시 발동하여,

    확인도 할 겸 길을 가로질러 이층집 대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몇 걸음 더 나아가기도 전에

    개 짖는 소리가 쩌렁쩌렁, 여름날 오후의 나른한 적막을 찢어 놓았다.

    그런데 무섭기는커녕, 추억이 되살아나 반갑기만 하다.



    상준은 무모한 시도를 그쯤에서 마감하고, 뒤돌아

    어린 그가 여전히 살고 있을지 모르는 문제의 집으로 걸어갔다.


    삼십 도 이상은 족히 되고도 남을 기온을 더는 참지 못하여 털 스웨터까지 벗어 들고

    땀에 젖은 러닝 차림으로 계단을 오르다가,

    강력한 접착제라도 밟은 것처럼 그는 갑자기 멈추어 섰다.

     

     



    '아니 그럼 뭐야!? 아까 그 여자가 날 봤단 말이잖아!?

    내 몸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인다는 것인가?'

     

     

     




    이봐요, 듣고 있으면 대답해 보세요!


    평행 우주 속에서 제가 이렇게 보통의 육신을 소유하고 있어도 되나요?
    제 과거를 함부로 휘젓고 돌아다녀도 저에게 아무 영향 없습니까?

     

     

     

     




    역시 아무런 메시지도 전하여지지 않는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하였으나,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하고 불안하기만 하였다.

     

     

    대문은 당연히 잠겨 있었고, 상준은 누가 볼세라 잽싸게 정민이네 집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스웨터와 외투를 담 저편으로 힘껏 던져 넣은 다음 몸을 날려 순식간에 담을 뛰어넘었다.


    어렸을 적 동생과 함께 올라가 그 위를 왔다 갔다 하면서 놀던 때에는 꽤나 높게 보이던 담벼락이었건만,

    지금은 사뿐히 뛰어넘을 정도로 아담한 담장에 지나지 않았다.

     



    기억 너머 어렴풋하게 남아있던 집 안의 정경이, 담 안 쪽에 생생히 살아 숨 쉬며 상준을 맞아 주었다.

    다 자란 그의 눈에는 "시간이 정지한 추억의 공간"보다 훨씬 비좁고 초라하게만 보여

    애처로움을 자아내는 "과거 속 현재"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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